영등포구 한강 라면

사회생활하는 에티켓 vs 할 말 하는 기개

by 찬란


“파인애플씨라고 하셨죠? 근데요…”

“네?”

“근데 왜…고기 구울 때 가만히 계세요?”

“네?”



스무살이라는 이유로, 대학 신입생이란 이유로 많은 것들이 용납되었다. 밥을 먹거나 술자리에 불려나가서 돈을 내는 일은 없었다. 여자 동기들끼리 만나면 엔빵을 하곤 했지만, 그런 자리 외에는 주로 나는 얻어먹고 다녔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부 여자 동기들의 인셉션도 나의 허영심 강화를 부추겼다.

“야, 원래 여자는 나이가 무기인거야. 왜 너가 돈을 내? 가서 얻어먹어.“

”그래도…돼?“

”당연하지. 원래 데이트할 때도 남자가 다 돈 내는거야.“

”오…그렇구나.“

”그러고보니 생각나는데 나 저번 소개팅에서 이상한 애 만났잖아…“

미드에서 보던 여주인공들이 하는 손짓과 거만한 말투를 따라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얇은 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화장법도 하면 할 수록 기술이 늘기 시작했다. 남자가 돈을 내지 않으면 뭔가 여자의 매력이 부족한 것이라는 묘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랬다. 나는 뭔가 잘못 배우고 있었다.

​​




“파인애플, 여기 앉아. 라면 갖다 줄게.“

”와, 오빠. 감사합니다…“

선배 두 명과 한강에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서울에서 20년을 살았음에도 말로만 들어봤지 먹어 보지 못한 ‘한강 라면’. 신입생이란 특권으로 나와 내 친구는 복학생 오빠 둘과 약속이 잡혔다. 오빠들은 우리를 만나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살뜰하게 챙겼다.

젓가락을 가져오고, 휴지를 놓고, 뜨거운 물을 받아오고, 쓰레기를 치우고…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줍잖게 도우려고 하면 선배는 손사레를 쳤다. 공주 대접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강 바람은 선선했고 캔맥주 하나를 곁들여 먹는 라면은 끝내줬다.

”캔맥주는 독일 게 좋아. 이 맥주는 안에 쇠구슬이 들어있어서 맥주를 신선하게 해 줘…“

이십대 중반 보송보송한 복학생 오빠들은 스무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에게 열심히 외국 맥주를 설명했다. 술을 입에 댈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된 나는 그저 신기했다. 아버지가 가끔 마시던 초록병 소주가 아니라 외국산 힙한 맥주라니. 그걸 한강에 앉아 라면과 같이 먹을 수 있다니. 분위기에 취한 나는 선배들이 주는 휴지로 입을 닦고 그들이 건넨 봉지에 쓰레기를 담았다.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



​​

“파인애플, 무슨 생각해?”

“엇, 아니야. 근데 뭐라고? 옆 자리에서 합석을 하자고?”

“어, 군인들인데 휴가 나왔다는데? 우리랑 합석하고 싶대.”

고깃집에 같이 온 여자 동기들이 킬킬 웃었다. 우리는 옆 테이블을 힐끗거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머리 짧은 보송이 군인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 받다가 코를 쳐들고 합석을 허락하겠노라 했다.

그런데…

“파인애플 씨라고 했죠?”

“네 그런데요?”

“근데 왜 고기 구울 때 가만히 계세요?”

“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얼음이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준비된 대답은 없었다. 나에게 질문을 한 보송이는 얼굴이 벌그레했다. 술이 취해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본인을 쳐다보자 보송이는 말을 이어갔다.

“아니, 고기도 굽고 젓가락도 놓고 술도 따라주고 해야죠, 가만히 앉아만 계시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분명 파인애플이 아니라 홍당무가 된 나를 보았으리라.

”야, 야. 이 새끼 취했어.“

”그나저나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죠?“

그 때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 좋았을 걸. 나는 하릴없이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친구들 또한 어찌할 줄 모르고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친구 중 한 명이 ‘죄송한데 저는 먼저 갈게요.’ 라며 자리를 일어서자 너도 나도 ‘저도요’ 라며 일어섰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

미드나 영화에서 보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드라마에서 당연한 듯 이어지는 참교육도 없었다. 나를 옹호하는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 친구와 그를 응징하고서, 같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도 못했다. 그냥 나는 쭈굴거리며 그 자리를 애써 웃으며 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보송이에게도 배울 것은 있었다.

나는 테이블 수저를 세팅하고 물을 따라주는 에티켓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초면에 무례한 일을 당했을 때,

“니가 뭔데 나한테 그래요? 별 꼴을 다 보겠네.”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기개도 있어야 했다.

이 두 가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 꼭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배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에티켓과 기개.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은 퍽 드물다는 것을.




오늘의 기부: 영등포장애인복지관

뇌병변 여성 장애우분께 자립을 위해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부하였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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