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받는게 딱히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날
“파~인~애~플~!!“
”어?? 왜???“
”야, 너 남친이 외솔관 앞에 서 있는데? 너 기다리나봐~“
”어머어머 꺄악~~~!!“
”(당황한척) 아, 아냐 남자친구. 아직은…“
”아직~~~?? 어머어머 얘 얘~~“
외솔관 안 사학 입문수업은 여대생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했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요새 연락이 뜸했던 감귤이었다. 인문대학교에 찾아온 감귤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나를 확인하자 반가운 기색이었다.
”여, 여기… 꽃인데…“
”고, 고마워…“
막상 남자가 나를 보러 강의실 앞에 찾아와 기다리니 좋기보다는 부끄러웠다. 귀여니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건 이게 아닌데. 귀여니가 묘사하는 교복 입은 짐승들은 막 손목을 잡고 여주들을 데려가 벽에 밀치던데. 감귤은 아무리 봐도 그렇게 할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꽃 들고 나 수업 듣는데 와줄 수는 있을 거 아냐?“
”……“
연애를 귀여니로 배운 파인애플의 생떼에 감귤이 항복했다. 다음 날 사학 입문 수업에 꽃을 사 들고 찾아오겠노라고 했다.
그랬다, 이 모든 건 우리 둘의 잘 짜여진 쇼였다.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꺄악 꺄악 거리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이게 다 뭐하는 거람. 나는 꽃다발을 들고 주춤 주춤 다음 수업 시간으로 향했다. 먼저 수업을 듣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보자 키득거렸다. 감귤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이 꽃다발을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인애플, 그럼 오늘부터 일일인 거야??“
”음…뭐… 그런 셈이지.”
“상경대라 그랬지? 야 그럼 너네 과팅 주선해봐…”
한참 뒤에 앉은 남학생 둘이 내 꽃다발을 손가락질하며 귓속말 하는걸 봤다. 맹세컨데 수업하던 교수님도 내 꽃다발을 흘낏 쳐다보고 쿡 웃었다. 친구 중 한 명은 손가락으로 장미꽃 개수를 헤아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않으리라.
“수업 잘 듣고 이따가 만나.”
감귤에게 온 문자 알림이 모토로라 핸드폰에 반짝였다. 왜 내가 이벤트 해 달라 하고 내가 부끄러운 거지. 탓할 사람은 나 자신 뿐이었다. 나는 그냥 문자를 읽지 않은 채로 두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강의자료를 프린트한 자료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나를 뺀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무슨 생각해? 멍하니.”
“아, 아냐.”
파드득 몸을 곧추세웠다. 감귤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중도에서 우리는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일 시험이었다. 경제학입문 교수님은 깐깐했다. 맨큐경제학 두꺼운 책을 샅샅히 훑어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는 목동으로 가야 했다. 나는 과외 알바를 여러 개 뛰고 있었다. 그 중 한 학생은 양천구 목동에 살고 있었다.
“나도 내일 시험 끝나는데, 너 과외하는 곳 까지 데리러 갈까?”
“어?…… 그래도 괜찮아?”
“어, 너가 데리러 오는 게 좋다고 했잖아.”
꼭 그런 사족 안 붙여도 좋으련만. ‘너가 좋다고 했었잖아’라는 말이 얼마나 안 로맨틱한지 이 남자는 알까. 너가 정 원하니 해준다는 거야 뭐야. 하지만 감귤은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고 약속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냥 너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니 내가 그것을 하겠다, 그뿐이었다.
“나…그럼 거기 곱창 사줘.”
“곱창?”
“어, 나…한 번도 못 먹어봤어. 그런데 꼭 먹어보고 싶었어. 곱창.”
“그래, 그럼.”
담백하게 대답한 감귤은 다시 맨큐의 경제학 책을 펼쳐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대답도 멋대가리 없기는. 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다시 교과서를 집어 들었다.
“곱창 모둠으로 하실거에요 대창만 하실거에요?”
“어…모둠으로 주세요.”
목동키즈는 생각보다 아무 대책이 없는 친구였다. 내가 아무리 붙잡고 씨름한 들 의욕없는 아이에게 지식을 넣어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초창기의 의욕이 사라지자 나름 나는 내 할일만 해야겠다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나면 기운이 쪽 빠지곤 했다.
“그럴 땐 기름진 걸 먹어줘야 해. 곱창 어때?”
“곱창? 그거 맛있다며?”
“대박, 너 아직 못 먹어봤어? 남친 뒀다 뭐해 같이 가~”
“그럴까…”
막 사귀기 시작한 감귤에게 곱창을 사달라고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감귤은 목동까지 먼 길을 찾아왔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는 곳에 앉았다. 기름이 번지르르한 돌판에 온갖 곱창이 올려져 부추와 함께 구워지기 시작했다.
“요거는 요 소스에 드시고, 조거는 조 소스에 드시면 됩니다~”
“아, 네네.”
기름이 지글저리는 곱창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들었다. 소스에 조심스럽게 적셔서 입에 넣었다. 찍 하고 기름이 터졌다. 고소한 기름이 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순대 안에 기름진 짜글이를 넣어 한 번 더 지진 것 같았다. 곱창 얘기가 나오면 엄마는 몸에 안 좋다며 손사레치곤 했다. 한 입 먹어보는 순간 바로 엄마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제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자극적인 맛, 나는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마냥 눈을 번쩍 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맛있어?”
“어, 너무. 너무 맛있어.”
“그래, 다행이다.”
감귤은 담백하게 대답하더니 부추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불현듯 눈 앞의 남자가 보였다. 내가 부탁하자 장미꽃을 들고 기다리는 수모도 겪고, 신촌에서 목동까지 먼 길을 달려와 곱창을 사주는 남자.
“저기, 감귤, 있잖아..”
“응, 왜?”
“내가 꽃 들고 와 달라고 해서 불편하진 않았어?“
”…왜?“
나도 모르게 말 꼬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거 여자가 해달라고 하면 싫어하는 남자들도 있을거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할 거고…”
“그런거 없었어.”
감귤은 담담히 대답했다.
“내가 좋아서 한거야.”
곱창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기부: 서울양천구재가노인복지기관
추운날 양천구 어르신들께 따뜻한 명절을 선물하기 위해 기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