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야 고마워. 작가님들 고마워요.
그래, 난 사내성범죄 피해자다.
내 인생의 어둡고 길었던 챕터가 끝나고 한동안 누워 지냈다. 내가 겪었던 일들은 지난하고 고단했다. 결국 가해자의 유죄 판결을 얻어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그저 어둡고 깊은 심연 속 주저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일상생활 조차 버거웠다. 물 한 모금 넘기는 것도, 그저 나가서 거리를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법과 시스템이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그들은 차갑고 단단했다. 괜찮은가 싶어 그들에게 기대가다도 그 차가움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근엄한 표정으로 내 손을 들어주며 내가 맞았다고 말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들의 사랑이 나를 부축했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이름 모를 이들,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해주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걷게 했다.
“괜찮아, 잘 하고 있어. 이제 일어나서 걸어보자!”
여전히 깜깜했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걷는 것이 익숙해지고 어둠이 천천히 희뿌옇게 걷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일상이 회복되었다고 느꼈다. 이제 내가 겪었던 일을 나누고 싶다, 공감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러 플랫폼들을 놓고 고민하다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악플이 적고, 내 글들을 일목요연하게 관리할 수 있고, 작가님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다. 이 청정한 공간에서라면, 내 이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으리라. 지나간 내 사건을 하나 하나 다시 정리하고 복기하기 시작했다. 작가 신청을 한 후 두 번만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칠흙같던 어둠 속 작은 불빛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24편의 글을 준비해, 브런치북을 발행했다.
대기업에서 겪은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구독자 100명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공분했다. 내 이야기가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수백명의 구독자가 생겼다. 꿈만 같았다. 글을 써서 올리면 알림을 받고 바로 들어와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용기가 대단합니다. 작가님이 삼켜야 했던 고통이 전해집니다.“
”숨이 막히네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꼈습니다.“
”강한 정신력으로 현명하게 대처 잘하셨네요.“
”작가님의 발걸음이 누군가에게는 불빛, 등대가 될 거에요.“
누구에게든 내 이야기를 숨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난도질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내 이야기를 꺼내놓고 이야기 나눌 좋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브런치를 통해 내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진심 어린 마음들을 얻었다. 나의 작은 용기에, 사람들은 내 글을 구독했고, 정성스러운 댓글을 달고, 후원해 주었다. 그것은 따뜻한 햇살처럼 내 방어막을 하나 하나 벗겨냈다. 나는 어느새 활짝 웃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처음 글을 올릴 때 나의 꿈은 단순했다.
‘나같은 고통을 겪는 단 몇 명에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꿈이 이루어 진 것도 모자라, 되레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얻었다. 내 글을 읽어주고 좋아해 주는 이들의 위로가 나를 회복시켰다. 훌륭한 글을 쓰는 다른 작가님들과의 교류와 유대감도 나를 성장시켰다. 무엇보다 나는 글쓰기가 즐거워졌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새로 생긴 것이다. 남편은 몰두하여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좋다고 했다.
”당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많이 밝아져서 참 좋아.“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는 더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