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참 좋아한다. 왜일까?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저 첫 손주 소식에 동네잔치를 계획하셨다가 첫 손주가 손녀라는 사실에 잔치를 취소하셨다는 얘기. 하지만 손녀가 태어난 후 그 누구보다 그 손녀를 예뻐하셨다는 얘기. 내가 주인공인 이 두 가지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이야기 속 할아버지는 존재하는데,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없다. 심지어 사진도 한 장 없다. 그나마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똑 닮았기 때문이다. 아- 기억이 하나 더 있다. 할아버지의 음력 생신과 내 양력 생일이 같다는 것.
외할아버지도 4학년 때쯤 돌아가신 터라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은 할아버지란 단어보다 할머니란 단어가 훨씬 익숙하다. 그래서일까? 시댁이나 친정집에 갈 때 '할머니집 가자.'라고 말하지 '할아버지집 가자'고 하지는 않는다. 혹시 할아버지들이 들으면 서운할까 '할아버지 할머니집 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좀처럼 되지 않는다.
시부모님에게는 8명의 손주가 있다. 형님 두 분에게 아이가 셋, 우리 집에 아이가 둘.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소년부터 애교쟁이 18개월 아이까지. 명절에 모이면 아이들 노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신이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아버님이다. 서로 할아버지의 등, 무릎을 차지하느라 애쓴다. 한 번이라도 더 안기려 서로를 밀쳐낸다. 할아버지에게 한 마디 더 말이라도 걸기 위해 소리도 질러본다. 자연스레 손주들 밥 먹이는 건 아버님 자치다. '피리 부는 할아버지'가 된 아버님 근처에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귀찮으실 법도 한데 허허 웃으시며 아이들과 놀아주신다.
친정부모님은 손주가 둘이다. 내가 낳은 아이 둘. 아직 남동생은 결혼 전이다. 시댁 같은 치열함이 아이들에게는 없다. 대신 같이 놀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가 있다. 아침부터 손자에게 놀이터에 나가자며 꼬신다. 놀이기구를 타실 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신이 나시는지 아이를 냉큼 안고 나가신다. 신나게 놀고 들어오는 아이 손에는 맛있는 간식이 한가득이다. 들어오시는 아버지 입가엔 웃음이 한가득이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화면에 비치면 그렇게 좋아한다. 깔깔깔 웃음이 가득 찬다.
종종 어머님이 농담 삼아 아이들에게 말하신다. "할아버지한테만 가서 할머니는 서운해." 머리가 큰 녀석들은 냉큼 가서 할머니를 위로하고 안아드린다. 꼬마들은 할머니의 서운함은 알지 못한 채 할아버지 쟁탈전을 계속한다.
왜 할머니보다 할아버지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잔소리'다. 손주가 반갑고 사랑스러운 건 두 분이 같지만 표현은 다르다. 할머니들은 어떻게든 밥을 먹이기 위해 애쓴다. '이거 먹어봐라, 저거 먹어봐라.' 밥그릇을 들고 손주를 따라다니시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음식과 간식을 내오신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옷차림에도 신경 쓰신다. '날씨가 추우니 모자를 쓰면 좋겠다. 더운 것 같은데 위에 옷 하나만 벗자.'
그런데 할아버지들은 다르다. 그저 오면 웃으며 반겨주실 뿐. 그리고 원하는 건 뭐든 해주신다. 어느 정도냐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뉴스를 포기하고 하루 종일 뽀로로를 같이 보실 정도로. 그 상황을 방지하고자 시댁엔 TV가 두 대지만, 되려 한쪽에서는 뽀로로 다른 한쪽에서는 신비아파트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에게 선택권은 단 두 가지다. 어린 손주들과 뽀로로를 보느냐, 조금 큰 손주들과 신비아파트를 보느냐.
일주일에 세네 번은 가는 시부모님 댁.(시국이 이렇지만 오해하지는 말길. 같은 빌라 바로 옆 동이다) 둘째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 대문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를 향해 쪼르륵 달려간다. 할아버지 무릎이 제 의자인 양 당연하게 앉는다. 할아버지 입에서 허허허 웃음이 나온다. TV를 켠다. 자연스레 첫째가 보고 싶은 뽀로로 공룡탐험대가 선택된다. 할아버지 옆을 파고들어 앉아 할아버지에게 공룡 설명도 하고 질문도 한다. 오늘도 그렇게 할머니 말고 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