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사랑은 시어머니
'점심' 직장인에게는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단어.
직장을 다니던 시절, ‘점심에 무얼 먹지?’하는 것만큼 큰 고민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그 결정권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 직원이 3명인 사무실인 데다 상사 두 분은 항상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셨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그만이었던 나날들. 그렇지만 매일 고민했다. ‘점심에 뭘 먹지?’
그다음 직장은 식사가 제공되는 곳이었다. 나의 고민, 나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는 일주일 메뉴에 따라 제공되는 식사를 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매일 하는 오만가지 생각 중 하나의 생각할 거리가 줄어든 것이니.
다음은 직장은 집이었다. 둘째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돌이 넘도록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했다. 매일 아이에게 뭘 먹이지가 고민이었다. 혼자면 라면을 먹어도, 빵을 먹어도, 그냥 지나쳐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분유를 먹일 땐 고민이 아니었던 일이 이유식을 먹으면서 큰 고민으로 찾아왔다. 20개월이 넘게 지속되던 점심 고민은 둘째가 어린이집에 입소한 후로는 매일이 아닌 주말의 걱정이 되었다. 걱정의 날이 주 7일에서 주 2일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에 이틀만 고민하면 될 줄 알았던 점심. 다시 매일의 고민이 되어버린 건, 평생교육사 실습 때문이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풀타임으로 잡은 실습. 중간에 1시간은 점심시간이다. 실습기관에서는 점심이 제공되지 않는다.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밖에서 사 먹을까 했지만 혼자 먹기는 쉽지 않다. 시청 앞이라 점심 피크 시간에 4명이 앉는 테이블을 혼자 차지할 수는 없으니. 이런 쓸데없는 양심. 합석을 해도 문제다. 기본 8천 원부터 시작하는 식사. 8천 원 X 20일 = 16만 원. 기본 메뉴 외에 다른 걸 선택하면 20만 원이 훌쩍 넘어가 버릴 터. 아- 먹을 걱정 없이 먹어보는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 집이 가까워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다른 실습생들이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그렇게 '점심' 앞에서 지고 말았다.
며칠 전 수술한 남편. 약은 꼭 밥을 먹고 먹어야 한다는 사람. 나한텐 아침밥을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 바로 옆 동인 자기 부모님 집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오늘, 남편이 과수원에 차를 두고와 내가 태워다 줘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귀찮지만 어쩌랴. 하나뿐인 남편인 것을.
아침 7시, 시부모님 댁에 갔다. 메뉴는 주꾸미 볶음, 어제 남은 알탕, 감자 미역국, 그리고 김밥. 아침부터 진수성찬이다. 오랜만에 아침이라 들어갈까 싶었지만 술술 들어간다. 둘째 녀석도 숟가락을 들고 앉아 열심히 숟가락질을 한다. 입맛이 없는 건 첫째뿐.
남편이 갑자기 "여보, 오늘 점심으로 이 김밥 싸 가." 어머님이 깜짝 놀라신다. 며느리가 점심도 굶고 다닌다며 속상해하신다. 그런 거 아니라며 망설이는 나를 두고 어머님이 만들어 두신 김밥을 써신다. 어느새 내 앞에는 김밥이 정갈하게 담긴 반찬통이 놓여 있었다. 앞으로는 김밥을 싸주시겠다는 어머님. 해가 뜨는 시간이 빨라지고 어머님이 일찍 나가시게 되면 해주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일회성 도시락이라 해도 기분은 좋다. 단무지는 없어도 맛난 재료들이 잔뜩이다. 며느리에게 뭔가 해주고 싶으셨던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코로나로 실내 취식이 금지된 요즘. 도시락을 먹을 곳이 없어 주차장에 세운 자동차에 앉아 어머님의 도시락을 펼쳤다. 김밥들이 나를 향해 손짓한다. 김밥을 들어 입으로 쏘옥 넣어 보았다. 꼭꼭 씹은 뒤 꿀꺽 삼켰다. 어머님의 사랑이 뱃속으로 술술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