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멸치다. 남편은 돼지다. 세상에 있는 사람을 돼지와 멸치로만 불러야 한다면 말이다. 왜 살집이 있으면 돼지, 없으면 멸치일까? 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인간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지 않을까?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어휴~ 왜 이렇게 말랐어.” 내지는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걱정일까? 인사일까? 어느 쪽도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면 화를 내야 할까? 아니지아니지. 유하게 넘어가야지. “아~ 진짜요? 그럼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남편에게는 6명의 조카가 있다. 다들 작고 마른 체형인데, 올해 8살인 Y만은 통통한 체격이다. 조카를 좋아하는 남편. 그걸 아는 조카들은 외삼촌을 만나면 우다다다 달려와 안기며 인사한다.
외삼촌을 꼭 닮은 Y도 예외 없이 달려와 안긴다. “어이쿠, 우리 Y, 무거워졌네.” 그 한마디에 서럽게 엉엉 우는 녀석. 외삼촌은 무럭무럭 자란 녀석이 내심 기특해 내뱉은 말이었는데, 아이에게는 아니었다보다.
9월이 되면 사과 수확으로 과수원이 바빠진다. 바쁜 부모님과 동생을 돕기 위해 형님 두 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일을 도와주러 오셨다. 덕분에 아이돌보기 담당이 된 나. 어머님이 바쁘시지 않으셨다면 맛있는 아침 밥상을 차려주셨을 테지만, 나는 불량 엄마이자 불량 외숙모. 아침으로 모닝빵에 초코크림을 발라주기로 했다.
“초코빵 먹을 사람?”하고 물으니 꼬맹이들이 서로 ‘나!’ ‘저요!’를 외치며 달려온다. 말 못 하는 우리 16개월 꼬마도 식탁에 달려와 냉큼 앉는다. 그런데 Y만 손을 들지 않는다.
“Y는 초코빵 안 먹을래?”
“네, 안 먹을래요.”
“왜? 조금 있으면 배고프지 않을까?”
“저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응? 8살이 다이어트 중이라고? 밥은 못 차려주는 외숙모지만, 뭐라도 먹여야겠는 외숙모는 또 묻는다.
“다이어트? 외숙모가 보기엔 좋은데. 누가 Y를 놀렸어?”
누가 놀렸다 하면 허공에 때리는 시늉이라도 해주려고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그냥 저 스스로가 싫어서요.”
초코크림을 바르던 손이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Y의 대답을 듣기 위해 마주쳤던 눈도 허둥지둥. Y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결국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 중고등학생 시절엔 꽤 콤플렉스였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그렇지 않다. 키 큰 친구들에게 “너넨 나 아니었으면 키 크다는 소리 못 들었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하며 되레 큰소리를 친다.
성격부터 외모까지 나를 쏙 빼어 닮은 4살 큰아이는 또래보다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걱정이 많았다. 주변 병원 성장클리닉을 찾아보기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약도 지어보았다. 어떻게든 밥을 먹이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가 밥을 굶을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참 우습지 않은가. 8살 아이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말과 내가 큰아이를 위해 하고 있는 일들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자기 스스로가 싫다던 Y의 말이 나를 향한 질책처럼 느껴졌다. 변해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을 왜 놓치고 있느냐고. 어떤 모습이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면 되지 않느냐고.
Learning to love yourself It is the greatest love of all -Whitney Huston 'Greatest love of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