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1729
휘는 자기가 공대생이라서 어쩔 수 없다며 이해하라고 했다.
신은 휘를 그리다가 언제나 미완성으로 작은 스케치북을 덮었다. 휘를 가득 담은 크로키를 가지고 싶었다. 재빠르게 순간을 잡아내야 하는데 휘의 순간은 어느새 신을 지나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걸 이해해야 하는 거지? 크로키라니 허황된 것 같기도 했다, 가득 담아내고 싶다는 그 바람 말이다.
30분에 만나요, 29분은 가당치도 않았다. 긴장한 기색이 자연스러운 1분, 그 시간을 신은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단 1분에 기분이 바로 하향곡선으로 꺾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투덜거리는 휘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곤 했다.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선 횡단보도 앞에서 벼락 뽀뽀라도 하자고 신이 입을 내밀면 90도로 꺾은 고개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콧방귀를 뀌며 스마트폰 화면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런 게 공대생이야? 이해해 달라는?
예상치 못한 건 받아들일 수 없는 공대생인 휘와, 새로운 건 일단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뛰어들고 보는 신은, 서로 다른 모퉁이에 이가 나간 세모 네모 그릇처럼 낯설기 일쑤였다. 어쩌다 사랑인 걸까.
신은 어떻게 해도 가까이 오지 않는 휘를 향해 원하는 만큼 쭉쭉 늘어나는 가제트 팔을 바라곤 했다.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고 현실적이 아니면 뜨뜻미지근한 휘가 신을 안달하게 했다. 그녀는 그런 휘의 모든 자잘한 순간들을 종이 위에 담고 싶었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그녀의 스케치북에 새겨두려는 신은, 도저히 담아지지 않는 휘 때문에 심장이 수시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재가 되어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시간이 모자랐다. 서른도 되기 전에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니. 기억이 끊기는 만큼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줄어간다. 시간이 갈수록 아무런 표정 없이 눈을 비우고 서 있는 일이 많아지곤 했다. 조금이라도 많이 바라보고 충분히 그리면서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새기는 것이 잘 살았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 같은 거였다.
휘가 마지막 사람이란 건 확실했다. 차갑게 신 앞에 서 있어도 표현할 뜨거운 말을 고르지 못해 전전긍긍 수줍게 순간을 비껴가는 안타까움을 휘 자신도 느끼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마구 흔한 단어 대신 신의 심장에 깊게 새길 한 마디를 결국 해주지 않았지만 괜찮다 그랬다.
신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휘가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신을 향해 오기를. 아무래도 공대생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들이 신이 사는 세상이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휘를 담아내고 싶은 스케치북 페이지가 비어 있어도, 휘가 공대생이라는 이유로 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결국 아무런 교차로도 준비되지 않아 서로 비껴가는 운명이래도, 신에게는 마지막 생명이 되는 것이었다. 휘는 이미 신의 심장을 뚫고 네 개의 방 중 하나를 택해 그곳을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신은 처음 휘를 마주친 순간에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은 행복하다
신은 사라진다
신은 사랑한다
신은 살아간다
그렇게 영원히
크로키북 표지에 벽돌처럼 차분히 맞춰 써놓은 다섯 줄, 신의 눈이 읽어낸 것들이 또렷한 소리로 퍼지지 않아도 오물오물 가까스로 내는 말, 행복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신의 기억 속으로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들어오는 행복하다는 말에 기댄다. 행복해. 유일하게 남은 그 말이 신을 가득 안는다.
기억나지 않는 그런 순간들이 그녀의 크로키북에 촘촘히 박혀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다. 페이지마다 깊은 눈빛으로 신을 바라보는 휘를 더 이상 신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신이 휘를 향해 손을 뻗었던 그 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억나지 않아도 신은 느낄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그 기억이 있었다는 절대 진리를 전제로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