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초고 2821
따끈한 자몽티에 흐드러져 펼쳐진 흐린 주황색의 자몽 슬라이스를 건져 입에 넣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몽이 독이다. 하주는 그와 이어지는 순간을 기대할 때마다 자몽을 떠올려야 한다. 어쩌면 그런 한계의 간격이 그들의 관계를 안전하게 버티게 할지도 모른다.
자몽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단 한쪽만 입에 들어가도 어느새 구부러진 혀의 뿌리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기도가 부어 숨통을 조인다고 했다. 뿌리 아래의 숨통을 조인다는 건 원래 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건가. 뿌리와 연결되는 건 고지식하다.
매일 자몽을 먹다시피 하는 하주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몽 크레이지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가 자몽 프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그에게 끌린다니 마치 죽음을 불사한 애절하고 비극적인 사랑 따위를 할 때가 온 건가.
혼자 너무 갔구나 풋 웃고 있던 하주의 스마트폰 창에 빨간 점이 보였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거나 어디선가 알림이 오면 생뚱맞게 창의 왼쪽에 박혀 확인해 주길 바라는 그 빨강이었다.
하주의 스마트폰은 일 년 내내 무음이다. 세상을 향한 일방통행로다. 하주가 원할 때만 세상과 연결한다. 그게 큰할아버지이건 아버지건 은사님이건 빨간 점으로 한참 들고 다니며 연결을 할지 안 할지의 갈등이 해결된 후에야 전화나 메시지 답신을 남긴다.
사람이니 함께 사는 세상에서 조화를 이뤄야 행복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원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혼자여도 신나고 행복한데 뭐 하러 섞이고 볶이고 갈등을 자처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도 대학 졸업 무렵 아버지가 달아준 족쇄였지만 하주는 그마저도 집에 두고 다니기 일쑤였다. 한 열흘쯤 안 가지고 다니면 집에 돌아왔을 때 영낙없이 스마트폰 옆에 아버지가 앉아 계시곤 했다.
“계집애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서 원…”
“무소식이 ㅎ…”
“희소식이란 말은 하지도 말아! 몇 년 후 네가 백골 시체로 발견되면 내가 그 몇 년을 네가 무소식이었으니 안심하며 살아도 좋단 말이냐?”
“아버지, 뭘 그렇게 극단적이세요? 별일도 아닌데…”
“짐 싸! 독립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집에 들어와 살아! 별채가 비어 있으니 집세 내면서 살도록 해. 원하면 별채 삥 둘러 담벼락도 쌓아 줄 테니 맘껏 혼자 살면 되겠구나!”
2년 전 그때 이후 가지고 다니는 것만 해도 큰 일이었던 스마트폰이 지금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창이 되었다. 저 빨간 점은 자몽 프리 월드에 사는 그가 맞을까.
전화번호를 묻는 그에게 홀린 듯 번호를 알려주고는 일주일째 그저 바보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게 하주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모아서 수도꾸 게임을 만드는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이상한 상상을 할 때쯤 빨간 점이 뜬 것이었다.
하주는 흰 속껍질이 두툼하게 깎인 자몽을 우물거리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당신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국제발신] 스팸이었다. 기대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났다.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하주가 했던 상상이 문제였다. 별일 없이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를 어떤 때를 위해 선배의 전화번호를 알아두었을 뿐일 수도 있었다. 쓸모없는 스팸 메시지가 하주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하주는 호텔 식당의 수석 컬러테라피스트다. 처음 마주하는 색의 조화와 균형으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 음식과 그 담음새를 디자인한다. 명쾌한 녹색, 빛나는 노랑, 따뜻한 주황, 열정적인 빨강은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다. 그중에서도 하주가 좋아하는 색은 주황이다. 주황의 새콤 쌉싸름한 자몽은 생기를 되돌려 튕겨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와 만난 건 호텔 내 식당의 수석 요리사들과의 정기 미팅에서였다. 새로 온 수석 요리사의 환영 파티 겸 새로 개발한 음식의 컬러와 분위기에 대한 스탠딩 담소가 이루어졌다. 열 명쯤 되는 요리사들 사이로 한눈에 봐도 그가 새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최근 개발했다는 디저트에 대해 우물쭈물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다.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 이야기가 한창 이었다. 하주는 주황색 자몽에 대해 색깔과 그 색깔이 주는 따뜻한 황홀감에 대해 소개했다. 황홀한 자몽이 하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쫄깃한 녹차 소면, 크림색 바삭함으로 싸인 찹쌀 탕수육, 우아한 여왕의 올림머리 같은 망고 빙수, 요리사마다 소개하는 음식이 그들 자신의 이미지와 닮은 걸 보면 그 음식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자몽을 소개했다. 숨통을 서서히 조이면서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그 과정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묘사했다. 그는 죽음의 자몽이 되었다. 하주와 그의 자몽은 황홀한 죽음을 가져다줄까. 낯선 죽음이 낯익은 자몽으로부터 왔다.
죽음의 자몽, 그가 예의 바른 웃음으로 하주를 막으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번호를 주고 가벼운 목례 후 말없이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는 죽음의 자몽이니까.
그게 일주일 전이었다. 테이블 위에 방치되다시피 하던 스마트 폰이 하주 손에 종일 들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기다림이 시작되자, 긴 기다림으로 안달했다가 깊은 기다림으로 초조했다가 일주일쯤 지나자 허탈감과 함께 시시한 집착이었다는 부끄러움이 왔다. 그런데 왜 스마트폰을 계속 들고 다니는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으슬거리는 한기에 따뜻한 자몽티를 만들었다. 주황빛으로 흘러 진한 차가 되면 한 모금에도 온몸에 행복한 온기가 돈다.
무심코 연 스마트 폰에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였다.
‘소금 크로와상을 만들려고 해요. 투명한 결마다 버터를 얇게 곁들여 진한 갈색으로 구워요. 오븐에서 방금 나온 거친 껍질에 캐러멜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꽤 굵은 흰 소금을 얹는 거예요. 혹시 따뜻한 자몽티 좋아하세요? 거기에 곁들이면 더 행복하실 거예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