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디얇은 교양

있다 또는 없다

by 서희복

잊어버릴만하면 전화를 해서 '이거 좀 맞춰 보세요'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그날 질문은 그거였다.


"교양이 뭔지 아세요?"


나는 그때 그랬다. 눈높이를 맞추는 거라고. 커다란 탄식과 이상한 깨달음의 신음이라고 믿고 싶은 소리로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인간 자체에 대해 갑자기 도가 터서 한 대답이 아니라 내가 읽어 온 그리고 곰곰이 살아온 기운에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호한 안갯속에서 마음의 무거운 돌을 내리겠다고 떠나거나 읽거나 가만히 있거나 마주한다. 목적어가 빠졌다고 하면 세상이라 하겠다. 그런 루틴 속에서 언제나 마음 가장자리를 세차게 뜯어가 상처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정답이 있다며 가르친다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니 항상 언제나 누구든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지. 이래라저래라 글로도 말로도 억압하려는 세상에 지친다. 양 머리 하고는. 이건 없는 거다. 얇음까지도 올라오지 않는 머리는 없어야 마땅하다.


답이 뭐예요?

없다고! 없다고! 없다니까!


교양도 그렇다. 답이 어디 있는가. 스스로가 닿은 과정에 있는 거다. 아이랑은 눈을 맞추어 앉아 들어주고, 잘 못 듣는 어르신에게는 귀를 가까이 대어 끄덕이고, 자기 마음에는 가만히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침잠하는 시간들이 귀하다. 그런 것에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들이 교양이라 하고 싶다. 그러니 교양이 없다 있다 하는 이분법적 오류에 괜히 혼자 씩씩거린다. 교양 없이!


답 달라는 사람들이 답 주려는 사람들이, 학생들이 선생들이, 일 더하기 일도 이가 아닌 것에 소스라치는 세상인데, 본분을 잊고 쉽게 사는 것에 골몰한다. 던져 주고받아먹고 삼키고 나서 뭔지도 모르고 살이 되는지 피가 되는지 살이 찌는지 피를 흘리는지 모른다.


피 터지게 한바탕 싸우고 나서, 닦아주고 꿰매주고 포용하고 같이 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올려주고 싶다. 교양 머리. 그 얇은 있음을 크게 느끼고 싶은 요즘이다. 교양 있는 사람을 정치하는 사람 중에서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학벌주의 귀족주의 지역주의 차별주의의 늪을 벗어나 대의를 함께 안고 나가는 세상을 향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 도적을 감싸는 좀도둑들, 무뇌스러운 맹목의 복종에 너무 차서 혀가 날아갈 지경이다. 이성과 감성의 뇌가 모두 뜯겨나가 남은 것은 괴사를 앞둔 고뇌다. 제발 고뇌하라. 국민의 짐짝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얇디얇은 교양이나마 챙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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