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아

비우기

by 서희복

잔뜩 고였잖아. 너무 무거워 비우기로 했지. 이천 칠백 구십 팔 개, 모두 선택 클릭 한 번에 그림이 싹 사라지고 잔상으로 떠돌아 채워진 공간, 비운게 맞는 걸까. 찌꺼기로 남은 향까지 휘발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눈 안에 남은 영원한 흔적에 좌절하며 타협한다. 대책은 없어. 사진과 소리, 편지와 엽서, 논문과 증서, 독서와 후기, 접촉과 마음, 산책과 흔적, 여행의 잔상, 찌꺼기 집착, 기억장치, 저장공간, 활동증거, 시각충만, 마신 것, 바른 것, 흘린 것, 웃은 것, 겨울, 환절기, 봄, 환절기, 여름, 환절기, 가을, 환절기, 겨울, 그리고... 꿈꾸는 오늘, 상상의 하루, 비우는 시간


사라지지 않는 클릭의 울림이 텅한 공간을 채우면 투명해진 과거가 소리로 남아. 가득 찬 휴지통에 뛰어가 마지막 버튼을 누르면 탁한 공간이 말끔해질까. 사라지는 건 비우는 게 아니지. 살아남는 게 비워진 거야. 세상에 온 이상 남길 수밖에 없어. 그 당황을 비우려는 마음이 들고 나서야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지. 손에 든 걸 비워도 남은 사진을 삭제해도 나는 내게만 남아있지 않아서.


비우지 않고도 사라질 수 있다면

사라지지 않도록 비울 수 있다면

그제야 볼 수 있는

나의 심장

나의 마음

나의 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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