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전갈
투명한 동맥을 미끄러지듯 흐르며 뜨거운 도시를 향한다. 얇고 가느다란 생명의 증거들이 서로를 다투며 바통을 넘겨주며 이어간다. 도시의 콘크리트 벽을 위안한다.
벌써 이글거리는 아침을 피해 유리로 싸인 높고 긴 건물로 모여드는 자동차, 사람, 강아지, 신발 자국, 숨소리, 존재의 흔적을 시간에 새긴다.
뜨거운 대기를 뚫은 열기가 유리에 튕겨 반사되고 인공의 차가움이 유리 안쪽을 가득 채우면 그 건물은 자이언트 외계인의 독특한 디저트가 될지도 모른다.
투명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힘껏 감싸는 뜨거운 햇빛에 구워진 건물, 어느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아이스크림 디저트, '오믈렛 노르베지엔'(Omelette Norvégienne)처럼 따뜻한 겉과 차가운 속으로 도시를 지킨다.
외제니의 죽음이 있었다. 어느새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타액 속에 스며 사라지고 마는 아이스크림 같은 운명이었다 해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처연함에 영화를 보며 얼마나 먹먹했던가. 영화 '프렌치 수프'(The Taste of Things; La Passion de Dodin Bouffant)는 외제니의 깊은 삶에 대한 통찰이다.
인공의 초록이 둘러싼 스펀지케이크 같은 황토 위에, 빛나는 머랭의 유리 외투를 입고, 기계가 뿜는 찬 입김을 물고서, 지글거리는 오븐의 열기를 견디고 있는 거다. 나의 도시, 내가 사랑하는 도시가 녹아내리고 있다.
발이 닿지 않는 흙, 길을 그리워하며 아스팔트를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끊어지지 않는 화학식의 구조들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공허로 차분히 인도한다.
나의 도시, 외제니의 깊은 사라짐의 축제가 아닌 얕은 욕정과 욕망의 그릇으로 깨어질까 봐 두려운 곳, 도시는 그렇게 연명한다.
기꺼이 나를 품어주는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가 너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