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의 『이별없는 아침』, 중앙일보사, 1984
떠나지 않는 활자들의 묶음이 있다. 그 오래전 시작이 어디인지 따라가고 있다. 눈물의 처음이 심장 벽에 각인된 듯한 그 책을 기어이 주문하고 말았다.
읽고 남은 앙금을 뜯어먹으며 살고 싶었지만 글을 쓰면서도 생각나곤 하는 베일듯한 슬픔의 순간이 어디였는지 오랫동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미쳐야지, 그래야지, 돌아가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쯤에서 내 뭉글거리는 인내는 동나고 말았다.
지금은 역사적 사명과 시대적 소명에 살아가는 소설가 한수산의 많은 책 중 하필이면 '이별없는 아침'에서 오래 서성거리고 있다. 지금껏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벌린 팔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며 시작과 끝을 깔끔하게 정의하고 편안해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직.
사명과 소명이랄 것도 없다. 세상의 잣대로 비교하면 눈에 채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삶. 그래도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내 삶에 압도된 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나 자신에게 하는 낮은, 하지만 결연한 독백 같은 거다. 매일 쓰리게 다시 돌아오는 이 멍한 통증이 거기부터인지 바라볼 작정이다.
결마다 접혀 들어가는 독한 통증, 어쩌면 너무 예민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형벌 같은 내 존재를 이 세상에 정당화하려는 노력이다. 삶과 죽음 사이 그 어디쯤에서 한없이 헤매는 영혼을 다독이는 진혼제 같은 글로 산다.
살아 있어도 죽음으로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심장벽을 거스르는 찌꺼기를 꿋꿋하게 홀로 걷어내려 한다. 세기말적인 혹은 불꽃의 끝으로 치닫는 짧은 찰나의 감성을 밝히는 글을 쓰고 싶다.
가장 아래 묵직하게 고인 그 소설, 한수산의 그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