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의 『이별없는 아침』, 중앙일보사, 1984
가을에는 속삭이는 물이 되고 웃음에 취한 연한 바람이 되어도 보고 노래하는 풀벌레이다가 그리움으로 익은 감이 되고 싶다던 이해인의 시를 흠뻑 사는 수니, 아니 순희의 이야기를 듣는다.
현재에도 드라마의 잦은 소재가 되는 부자 남자와 평범한 여자 이야기다. 재력으로 고상한 겉모습을 한 남자의 어머니, 모멸감과 수모의 조용한 칼질로 여린 순희의 마음을 베고 다시 또 베는 비인간을 본다. 진부하지만 항상 있는.
재벌 2세 남자, 석우와 평범한 한복집을 하는 홀어머니와 오빠를 둔 여자, 순희. 굴욕과 반대를 참고 사랑을 택한 애틋한 두 사람이 꿈처럼 행복하게 다정하게 보내는 시간은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돌아오지 않게 된 남자의 마지막을 예고한다.
그의 뒤에 허망하게 남은 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보낸 아름다운 시간과 그 시간이 그녀에게 남긴 커다랗게 움푹 파인 웅덩이다. 제대로 다독이며 메꾸며 살아낼 수 있을까.
남은 사람은 살아야 하고, 떠난 사람은 남은 사람의 가슴에 평생 슬픈 꽃이 될 것 같지만 시간은 어쩐지 상처의 가장자리를 무디게 하고 기어코 딱지지게 해 어떻게든 아물린다. 그동안, 통증을 무디게 해 줄 바라봐주는 사람의 소리, 자연의 소리, 자기 자신의 소리만 허락할 뿐이다.
살아진다.
어머니가 건넨 목도리, 그 둘러싸인 온기에 서럽다는 건 떠난 사람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다. 너와 나의 존재 간격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고 크고 넓은데 내 슬픔은 어쩐지 너를 떠나보내고도 다른 곳으로부터 건너온 온기에 녹아드는 것 같으니 이 얼마나 가냘프고 연약한 삶이란 말인가. 살얼음 같은 사랑이란 말인가.
커다랗게 낯선 시간 속에서 Who?(누구?)에 대해 It's me.(나야.)라고 대답한 것만으로도 그들의 진한 공간을 예감한다. 그 오래전 아무 말 없이 I don't want to leave here.라는 쪽지를 내게 건네고 가버린 한 영혼처럼 두 언어의 간극이 주는 감성은 오랜 여운을 담은 상상으로 뒤척이게 한다.
또 다른 어떤 시간들이 남아 있는 건가. 여러 첫 충격들, 자살 여행, 짧은 사랑, 영영 잃은 순간들이 여전히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