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열 진통제

존재는 조용히 이탈 중

by 서희복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조금씩 사라진다. 바람이 추상화 같은 풍경들을 삼키며 그녀의 존재를 날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감아야만 하는 눈 속에 남아있지 않은 기척, 보이지도 비치지도 않으니 사라짐의 무게가 가볍다.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볼 수 없다. 굉음으로 달려가는 오른쪽 왼쪽의 엔진들, 사라지라는 소리가 그녀의 실루엣을 지나간다. 바람이 통하지 않은 부피만큼 그녀는 여전히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사라지는 중인, 사라지는 건 존재했었다는 기억이 가보지 못한 길에 버려지는 거다.


사라짐의 끝은 존재의 흔적이니 존재의 실체를 애도하는 깊은 의식을 시작하는 건지도 모른다. 멈추는 것은 세상의 끝을 알리는 실마리로 이어져 바람을 삼킨다. 감은 눈의 열린 틈을 통해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붉은 열기가 실체를 태우고 있다. 아세트 아미노펜, 타다만 그녀가 잿더미를 딛고 나와 걷는다.


감은 눈꺼풀 위를 지나가는 빛줄기가 세상의 존재를 알리는지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표시하는지 알 수 없다. 한낮의 종말과 마주 보고 있다. 얼마나 서있었던 걸까. 사라지는 건 다시 존재로 회귀하는 길, 그녀가 그랬었다는 추억이 그녀를 향해 웃고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거라며 레테의 강바닥에 모래집을 짓는다.


그런 소용돌이를 지나 다시 소풍이라도 나오는 날에 여전히 슬픈 시간이 올 줄 모르고 아직도 찬란하게 빛날 줄 아는 어리석음에 속는다. 남은 그녀를 바래다주는 일은 그녀가 꾸준히 그녀 자신을 위해 인내해야 하는 길이다.


돌이키지 못할 완벽한 어둠으로 들어가는 길에 비가 오면 투명해지는 디필레이아 꽃을 따 왼쪽 귀에 꽂을 것이다. 그렇게 투명하게 뭉텅 뜯겨나간 시간을 지나갈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공존하는 하이데가 숲길에 존재를 흘리러 그녀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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