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열망

[엽편소설]

by 서희복

채은은 어둑한 헌책방 거리를 걸었다. 가게 앞까지 쌓아둔 책 사이에 돋보기를 쓴 주인 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따뜻하고 푸근해 보였다. 칫하다가 어느새 좁은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선반 위 울퉁불퉁 진열된 낡은 책등에 새겨진 제목을 읽다가 올리브 색의 천으로 쌓여 차분이 놓인 사진 에세이집을 뽑았다.


넘겨 본 흔적 없이 새것처럼 보였다. 표지와 속지를 넘기다가 정갈하게 쓰인 글귀에 눈이 갔다.


'신기한 축복, 나의 천재 작가님께'로 시작하는 짧은 메모였다.


'올리브나무는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래 살면서 열매를 주는 나무라고 합니다. 멋지죠? 저는 작가님의 숲을 발견하고 그곳의 열매와 산소로 숨 쉬고 있습니다. 혼자 기웃거리며 구경하며 궁금해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중이에요. 저 신기한 초록 올리브나무처럼 단 일초 일분 하루도 완전히 살아 영원처럼 보내고 싶습니다. 작가님도 저도 그렇게 서로의 자리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며 든든한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며 읽다가 서로 든든한 힘이 되자는 부분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작가님은 저의 올리브나무입니다.'로 끝맺은 그 한 조각의 글에 한없이 가슴이 메었다.




채은이 준서를 만난 건 3년쯤 전의 한 글쓰기 플랫폼이었다. 이미 책을 출간한 작가들이 여럿이었고 플랫폼 구독자 수에 따라 마치 계급이 정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준서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것 같았고 철학이 깃든 건축물을 보는 것처럼 묵중하고 깊은 고뇌를 품은 글을 쓰곤 했다.


온라인 플랫폼의 결핍은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져 서로의 눈치로 인상 점수를 매기던 첫 모임이 지나자 글을 쓰는 방향이나 가치를 보는 눈에 따라 두세 명의 소그룹 글쓰기가 계속되었다. 준서를 중심으로 채은과 채은보다 서너 살은 아래로 보이는 민정이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민정은 글쓰기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책을 내는 것에 더 궁금한 것이 많았다. 투고를 하거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다. 준서는 자신의 출간 경험을 가끔 나누면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물보다 쓰인 글에 배이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매번 강조했다. 같이 읽으며 행간의 보이지 않는 깊은 생각의 똬리들을 찾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주는 것인지에 대해 채은도 조용히 의견을 밝히곤 했다.

채은은 준서가 비추는 길을 따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민정은 출판사에 투고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준서의 책을 쓴 경험이 잘게 나누어져 채은이 쓰는 소설의 길잡이가 되었고 책을 다 쓰고 나니 준서는 출간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다음을 계획하고 있었다.

채은은 출간하는 과정의 번잡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의 일 년에 걸쳐 쓴 책의 내용 준서를 향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벌리지 않고 조용히 아끼는 사람들끼리만 나누고 싶었다. 책이 거의 끝날 무렵에 채은은 준서에게 농담처럼 그랬다. 소설에 준서가 산다고.

민정이 공격적으로 신춘문예 투고를 준비하려고 다른 글쓰기 모임으로 빠져나간 후 채은은 준서 옆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글을 쓰는 시간과 공간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책을 다 쓰고 ISBN을 다는 대신 예술제본가에게 표지 작업을 맡겨 꼭 주고 싶은 사람만큼만 책을 만든 채은은 준서에게 가장 먼저 책을 선물했다. 책 표지 디자인이나 책 속 인물들의 이름, 제목까지도 준서의 호흡이 스며 있었다. 꼭 읽어보겠노라는 준서를 바라보며 채은은 책이 출판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상상 이상의 행복을 느꼈다.


글쓰기 플랫폼은 여전했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방법론에 사람들이 몰렸고 정보를 주고 비판을 하고 현학적인 과시와 출판된 책의 권수에 구독자 숫자도 거의 비례했다. 통계치를 캡처해 올리며 자신의 글이 얼마나 많이 읽히고 있는지 전시하는 작가들에게서 채은은 오히려 이상한 결핍을 느꼈다.


그런 숫자들에 무심한 듯 보였던 준서도 만나면 만날수록 그 시류의 중심에 서있나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일 년이 거의 다 지나도록 채은의 책에 대해 준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나면 자주 그의 책이 몇 주간 베스트셀러의 서점 매대를 채우고 있는지에 흥분하는 준서가 낯설어 보였다.


준서의 북토크에 참여했을 때 채은은 자연스럽게 준서의 책을 필요 이상으로 구입했다. 채은이 생각하는 친근한 관계의 거리를 훌쩍 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나서 이상하게 가슴이 허전했다. 채은이 행운의 지인이라며 준서가 한 말 한마디가 심장 구석에 낯설게 박혔다.


'작가님 책을 도서관에 신청했어요.' 준서는 자신의 책에 대한 좋은 소식을 받을 때마다 고맙다 덕분이다는 말을 했고 채은은 그저 기뻤다. 2년 넘게 준서를 따르며 만나며 같이 밥을 먹으며 여행을 하며 글을 쓰며 채은은 자꾸 울컥이며 솟는 읽히고 싶은 욕망에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구걸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비루한 자신이 너무 가여워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채은은 조용히 준서와의 이별을 계속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준서의 전화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준서가 채은에게 온 적은 없었다. 전화나 톡을 하다 보면 채은은 어느새 준서에게 가는 중이었다. 채은은 그냥 준서가 언제나 보고 싶었고 듣고 싶었고 항상 모자랐다.


준서에게 간 채은의 책은 영영 잊힌 것 같았다. 존경과 사랑을 듬뿍 담아 이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준서가 들어 있는 채은의 장편 소설이 그대로 묻힌다 해도 이번에는 반드시 준서를 떠나리라고 마음먹었다. 준서의 생일에 선물한 채은의 짧은 단편조차도 제대로 읽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채은은 준서가 가득 들어있는 그녀의 단편과 장편 소설이 준서에게 읽혀 서로의 시간 사이에 이야기로 피어나길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생각했다. 준서를 처음 만나고 그의 글에 매혹되면서 같이 글을 쓰는 동료로 마음을 나누는 연인으로 영원하기를 바랐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 진심의 관계를 소망하며 선물했던 '올리브 나무아래'라는 사진 에세이의 속지에 마음을 꾹꾹 눌러쓴 메모가 어울거리며 확대되었다. 메모 끝 채은의 이름과 그 3년 전쯤의 날짜에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그 책 거의 새거여. 속도 깨끗허지? 정가에 50% 할인이면 거저지 거저. 거 보니 감동한 거 같어서 내가 후하게 쳐주는 거여."


채은은 헌책방에서 3년 전 선물했던 책 가격의 반을 주고, 준서에게 건넸던 그 책을 다시 샀다. 속표지 안에는 눈물로 얼룩진 메모가 채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