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퇴고 4095
어떤 사람에게는 자몽이 독이다. 하주는 선우와 이어지는 순간을 기대할 때마다 자몽을 떠올려야 한다. 어쩌면 그런 한계의 간격이 그들의 관계를 안전하게 버티게 할지도 모른다. 선우는 자몽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단 한쪽만 입에 들어가도 얼굴이 하얗게 바래진다고 했다. 어느새 구부러진 혀의 뿌리 아래쪽으로 자몽 즙이 내려가며 이어지는 기도가 부어 숨통을 조인다고. 뿌리 아래의 숨통을 조인다는 건 원래 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건가. 뿌리와 연결되는 건 고지식하다.
하주는 호텔 식당의 수석 컬러테라피스트다. 처음 마주하는 색의 조화와 균형으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 음식과 그 담음새를 디자인한다. 명쾌한 녹색, 빛나는 노랑, 따뜻한 주황, 열정적인 빨강은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다. 그중에서도 하주가 좋아하는 색은 주황이다. 주황의 새콤 쌉싸름한 자몽은 생기를 되돌려 튕겨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선우를 만난 건 호텔 내 식당의 수석 셰프들과의 정기 미팅에서였다. 새로 온 수석 셰프의 환영 파티 겸 새로 개발한 음식의 컬러와 분위기에 대한 스탠딩 담소가 이루어졌다. 열 명쯤 되는 셰프들 사이로 한눈에 봐도 그가 새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최근 개발했다는 디저트에 대해 우물쭈물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다.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 이야기가 한창 이었다. 하주는 주황색 자몽에 대해 색깔과 그 색깔이 주는 따뜻한 황홀감에 대해 소개했다. 황홀한 자몽이 하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쫄깃한 녹차 소면, 크림색 바삭함으로 싸인 찹쌀 탕수육, 우아한 여왕의 올림머리 같은 망고 빙수, 셰프마다 소개하는 음식이 그들 자신의 이미지와 닮은 걸 보면 그 음식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선우는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자몽을 소개했다. 숨통을 서서히 조이면서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그 과정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묘사했다. 그는 죽음의 자몽이 되었다. 처음 마주친 자리에 하주의 삶과 선우의 죽음이 만났고 그 사이에 자몽이 있었다. 선우가 하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하주의 표정을 선우가 알아채지 않기를 바랐다. 하주와 선우의 자몽은 황홀한 죽음을 가져다줄까. 낯선 죽음이 낯익은 자몽으로부터 왔다. 죽음의 자몽이라니.
첫 미팅 후 선우가 바로 따라 나와 예의 바른 웃음으로 하주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하주는 무언가에 홀린 듯 번호를 주고 허둥대고 있었다. 부드럽고 가벼운 목례 후 말없이 돌아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았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는 죽음의 자몽이니까. 하주는 사무실로 돌아와 따끈한 자몽티를 만들었다. 흐드러져 펼쳐진 흐린 주황색의 자몽 슬라이스를 건져 입에 넣으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자몽 크레이지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가 자몽 프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선우에게 끌리다니 마치 죽음을 불사한 애절하고 비극적인 사랑 따위를 할 때가 온 건가.
하주의 스마트폰은 일 년 내내 무음이다. 세상을 향한 일방통행로다. 하주가 원할 때만 세상과 연결한다. 작게 열린 창에 맺힌 빨간 점으로 한참 들고 다니며 연결을 할지 안 할지의 갈등이 해결된 후에야 전화나 메시지 답신을 남긴다. 사람이니 함께 사는 세상에서 조화를 이뤄야 행복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원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혼자여도 신나고 행복한데 뭐 하러 섞이고 볶이고 갈등을 자처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창이 되었다. 그에게 번호를 알려주고는 일주일째 그저 바보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게 하주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선우를 처음 만난 후 테이블 위에 방치되다시피 하던 스마트 폰이 하주 손에 종일 들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기다림이 시작되자, 긴 기다림으로 안달했다가 깊은 기다림으로 초조했다가 일주일쯤 지나자 허탈감과 함께 시시한 집착이었다는 부끄러움이 왔다. 그런데 왜 스마트폰을 계속 들고 다니는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으슬거리는 한기에 따뜻한 자몽티를 만들었다. 주황빛으로 흘러 진한 차가 되면 한 모금에도 온몸에 행복한 온기가 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끌림을 자몽향기에 가두어두고 싶었다.
혼자 너무 갔구나 풋 웃다가 하주는 스마트폰 창에 빨간 점을 보았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거나 어디선가 알림이 오면 생뚱맞게 창의 왼쪽에 박혀 확인해 주길 바라는 그 빨강이었다. 저 표시는 자몽 프리 월드에 사는 그가 맞을까. 전화번호를 모아서 수도꾸 게임을 만드는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이상한 상상을 할 때쯤 빨간 점이 뜬 것이었다. 하주는 흰 속껍질이 두툼하게 깎인 자몽을 우물거리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당신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국제발신]
격자 괄호 안 스팸이었다. 기대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났다.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하주가 했던 상상이 문제였다. 별일 없이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를 어떤 때를 위해 선배의 전화번호를 알아두었을 뿐일 수도 있었다. 쓸모없는 스팸 메시지가 하주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이면 그 하루 동안 겪었던 모든 색깔들과 향기들이 하주의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화려한 밀도를 남기며 다음 날을 기대하며 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디저트를 연구하는 곳은 호텔 3층 카페 옆으로 길게 투명한 유리벽으로 밖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거의 카페가 닫힌 이후 지나게 되어 어두운 그곳에 눈길을 주던 곳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투명하게 밝은 빛이 어울거리며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선우였다.
그의 테이블 위에는 뭔가 하얗게 만들어 둔 반죽이 보였다. 얇게 반죽을 밀어 버터를 바르는 선우를 보며 이상하게 심장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흰 초승달 같은 반죽 여러 개를 오븐에 넣고 선우는 작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하주는 한참을 서서 선우를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선우는 그곳에서 분주했고 하주 또한 선우를 바라보며 그녀의 심장 속 네 개의 방을 헤매고 있었다.
그날은 뭔가 만족한 듯 선우의 얼굴이 더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고개를 기울여 선우의 테이블 위에서 본 건 윤기 나는 브라운 색의 작은 초승달 모양의 빵이었다. 그 위에 선우가 까끌해 보이는 무언가를 얹었다. 채 올려지지 않은 반짝이는 하얀 결정체가 쟁반으로 굴러 내렸다. 선우는 가만히 그 옆에 앉아 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주는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듯 빵에 시선을 둔 선우의 눈빛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밤 동안 하주는 선우와 선우의 따뜻한 눈빛과 황홀하게 흘러나오던 그 빵의 향기를 그리워했다.
다음 날은 수석 셰프들과 업무 전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미팅 두 시간 전에는 사무실에 나오는 하주가 새벽에 도착해 사무실을 향해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누군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금 크로와상을 만들었어요. 투명한 결마다 버터를 얇게 곁들여 진한 갈색으로 구웠어요. 오븐에서 방금 나온 거친 껍질에 캐러멜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굵은 흰 소금을 얹은 거예요. 혹시 따뜻한 자몽티 좋아하세요? 거기에 곁들이면 더 행복하실 거예요.”
하주는 엉거주춤 소금 크로와상 두 개가 나란한 따뜻한 은쟁반을 받아 들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며 뭐라 해야 할지 도대체 생각나지 않았다. 엷은 미소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는 선우의 모습은 하주에게 새로운 세상으로의 문을 여는 것 같았다.
한 시간가량의 미팅은 신입 수석 셰프가 새로운 레시피를 소개하면 서로 간단한 피드백을 주는 자리였다. 하주는 두 명의 셰프가 그들의 새로운 레시피를 소개하는 동안에도 선우가 어떤 새로운 디저트를 소개할지 궁금했다. 선우가 천천히 쟁반의 아치형 뚜껑을 열었다. 소금 크로와상이었다.
“미묘하게 다가오는 사랑의 온도를 겹겹으로 오래 머물게 하고 싶었어요. 크로와상은 서로의 거리와 향기가 따뜻하게 스며들게 합니다. 소금은 달콤함을 더욱 깊고 진하게 하지요. 소금 크로와상은 오랜 다정함과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하는 설렘입니다.”
셰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로 끄덕였다. 선우가 조용히 하주를 바라보고 있았다. 하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