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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삶이지

[엽편소설] 가을의 정리

by 서희복

살아야 하겠어서 그랬다는 핑계가 단골이었다. 진서의 마음을 언제나 비켜가는 그늘진 기대가 이젠 그만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살살 올리는 약을 항상 이미 눈치챘으면서도 가만히 그래그래 그럴 수 있다고 왜 생각했던 건지, 결국 톡에 독설을 쏟아 찢어발기고 나가기를 누르고서야 그 이유가 눈앞에 툭하고 떨어졌다.


1단계 정리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진서가 정한 그녀의 마무리가 충동으로 빨라지거나 두려움에 늦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순수하게 남은 시간들에 관계의 밀당이나 눈치가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억압하게 된다면 추한 눈빛으로 끝내게 될까 두려운 거다.


알량한 자존심이라 불러도 변명할 말은 따로 없다. 진서가 무턱대고 한 곳을 향해 살지 않기로 한 것은 사실 타인의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둘의 관계에서도 딱히 정해진 약속 따위는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고 언제나 서열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게 무거운 추처럼 느리게 흔들렸다.


그저 그 시간 거기에서 보이는 대로 사랑하기로 했던 다짐들이, 여러 가지 진서에게 와서 부딪히는 물리적인 자극과 삶의 흔적들로 잘게 쪼개진 타격을 받으며, 끝없는 허무와 일말의 시시함이 있었다. 우리는 딱 이만큼일까.


칭얼대도 좋았을 텐데 솔직해도 좋았을 텐데 평행선으로 같은 곳을 바라봐도 좋았을 텐데...


알면서도 눈을 감고 끄덕이던 고개들이, 금세 깎아 시험해 보는 목각 인형으로 잊혀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할 땐, 이미 진서는 톡의 문을 닫아버리고 서늘한 등을 대고 찔끔거리고야 말았다.


진서가 한 독설들이 제대로 닿지 않도록 닫을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할 것이다. 그가 사는 삶에 진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프레이 되는 독으로 머물고 싶지는 않다고 고개를 흔든다.


마음을 잠그고서야 알아낸 비밀들은 진서의 심장에 베인 상처를 냈지만, 통증이 지나가는 길을 폐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다소 위안이 되는 밤이다.


너 만은 잘되었으면 해, 나 없이도.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진서는 기어이 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던 진서의 유통기한은 벌써 지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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