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오래 같이 하던 시간을 정리하던 날이 닥치기 전에는 그런 기분을 알 수 없다. 오나 보다 사랑하나 보다 가려나보다 보내야 하나 보다. 계속 같이 하려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 시간도 좋은 거야. 그는 나의 마음을 읽는다.
막연하게 뿌열 것만 같던 미래가 어떤 한순간 갑자기 명확해져서, 그 당황에 쏟아진 단어가 꾸준히 같이하는 미련이 된다.
'밖이 무서워. 밖에서 못 먹을 것 같아.'
밤마다 피어오르는 살 태우는 냄새, 닭도 돼지도 소도 자신을 불사르며 사람을 살린다. 어쩌면 죽어서도 불판 위에서 활활 오르는 주홍을 맞으며 오르가즘을 느끼는지도 모르지. 운명이란 사람의 것만은 아닐 거야. 축축한 입 속으로 이어지는 도륙의 현장, 이빨의 집착을 견딜 수 없다.
생선도 살인데 거친 마찰과 파열이 없어서 괜찮다는 이 아이러니에 미끄러운 상한 생선살을 물고 있는 듯 울렁거린다. 시장에서 머리 꼬리 잘린 몸통에는 온전한 삶이 들었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지나가던 생선 트럭에서 두툼한 몸통에 볼살까지 붉은 듯한 머리와 부채 같은 꼬리를 보는 순간 내 삶이 통째로 음식 쓰레기통에 박히는 것 같았다. 악취가 나.
하기 싫은 건 이주일 주기로 만들어 쌓아 두라는 지독히도 현실 강박적인 말에 그래 이 주일에 한번 온다는 거구나, 이내 이해한다.
그런데 뭘? 이제는 네가 정해주는 것 말고 눈 뜨면 바로 보이는 거만 할건데?
내 공간에 들어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좋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사는 것의 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죽는 것의 시작은 어디일까 단지 궁금해졌을 뿐.
'띠띠'
제발 진동이라도 켜두라는 그의 말, 유일하게 고분했던 그 말의 이유를 휴대폰 창을 통해 본다.
'갈만한 식당.pdf'
피디에프는 일하는 모드잖아. 일 말고 휴식이나 여유는 도저히 안 되겠니. 키스나 아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이 눈을 맞추는 것으로부터 천천히 열리는 그런 건 안되는 거야?
'오늘 밤 준비.pdf'
만난 지 천일쯤, 나는 다가오는 흥분이 좋아서 어떤 꽃을 테이블에 놓을까 신나 하고 있었지. 그때 너의 파티 준비는 그놈의 피디에프로 왔잖아. 그때 난 하나로 보내고 싶은 시간이 둘로 갈라지는 걸 느꼈어. 나는 곧 비행기 티켓을 사서 네가 올 시간쯤엔 거의 그곳에 도착했어. 수완나품국제공항.
그가 한국에서 어떤 파티를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낯선 공항에 오래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피곤해지길 기다렸던 것 같다. 그 첫 피디에프로 그와 나의 세계가 베링해의 툭툭 끊어진 섬들처럼 건조하고 객관적이 되었다.
그는 내가 비현실 오차원이라며 패닉 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인생을 선물 받은 것으로 하겠다 했다, 마치 용서한다는 듯. 삼일 만에 돌아온 내게 청양고추로 국물을 낸 황탯국을 끓여 주었다. 그는 벌을 준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겐 선물이었던 눈물 나도록 매운맛, 사는 건 참 맵다.
내가 조금이라도 호기심을 보이고 궁금해하면 바로바로 피디에프를 날리는 그, 정보력에 분석력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그가 AI가 아닐까 문득 겁이 나곤 했다. 물어보진 않았다, 정말 그렇다고 할까 봐.
딱 한번 그가 보낸 피디에프를 열어본 적이 있다.
'네 방 구조.pdf'
동거하는 동안 두 번의 이사에 수십 개의 피디에프가 차곡차곡 쌓였다. 주방배치쩜피디에프, 거실오디오셋팅쩜피디에프, 내방구조쩜피디에프, 그의 방의 구조를 어떻게 하든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었건 나중 그의 방의 실제 모습과 그 배치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을 테니까.
그런데 왜 내 방을 그가 결정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해준 것마다 반대로 바꿨다. 재료도 크기도 위치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영역에 매달렸다. 동거 십 년, 그의 틀이 나 때문에 잔금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공간을 둘까.
다른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 그와 나는 공유하는 시간 속에 공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내가 그랬다. 그게 무슨 억지냐고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많이 사랑한다. 쌓인 피디에프파일들만 아니라면 그것들의 늘어선 길이만큼 그를 더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향한 마음에서 피디에프파일만큼의 한기를 빼고 나는 나를 위한 공간의 천장을 마주한다. 그때껏 자유롭지 못했던 나의 고독이 그제야 나를 천장으로 밀어 넣는다.
어둡도록, 다시 시작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