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는 잉여일지도

11 흔적은 어디

by 서희복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마음을 회색 안개로 채운다. 어딘가에서 본 임시 저장이라는 표식을 되돌아 짚으며 돌아가려 애써도 닿지 않는 안타까움에 독한 새벽어둠에 숨어든다. 누군가 부르고 있었던가. 어디선가 닿으려는 손짓이 있었던가. 보이지 않는 임시는 남아도는 공허일지도.


어쩌면 여분의 시간일지도 모르는 차원을 걷는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불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나만 나를 바라보는 느슨한 온도들이 구석마다 촘촘하다. 확장된 이 부피만큼 자신의 가치와 고뇌로 끓는 시간 동안 조금은 세상을 향해 자라는 거라 믿는다.


지독히 혼자여도 최소한의 타자로 향하다 차분히 되돌아오는 시간이 쌓인다. 한 층씩 쌓이는 시간들이 세상과 연결되어 온전해지고 손에 닿지 않는 향기로 어느 구석에 앉을 것이다. 그들의 흔적이 되돌아와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때론 허무하다. 가장 깊게 고독을 돌아 천천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거다.


닿지 않는 그리움에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무용한 과거의 잔해를 끌어 모으고 있다는 회한에도 대체 과거라는 것의 무게를 재서 어쩌란 말인가 이내 허무가 온다. 반드시, 마침내, 결국, 간간이 위태로운 단어들을 모으다가 지치고 말지만 어쨌든 이어가서는 안될 고인 어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기쁘게 바빴던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마치 순서가 왔다는 듯 침잠하며 한동안 허둥거린다. 잔상을 떠나보내기 위한 위안의 시간인지 시간을 밀고 나가기 위한 기대의 시간인지마저 확실하지 않은 이 불투명한 시간의 흥분이 이상하게도 참 좋다. 어디로 가도 괜찮을 것 같은 이 무한한 해방의 느낌이 숨을 이어지게 한다.


색깔을 선택해야만 했던 지난 며칠이 꿈같이 지나갔다. 매번 다른 색깔을 앞에 두고 손을 뻗었다가 거둬 들였다가 눈에 담았다가 외면했다가 마침내 고른 색깔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현실과 이상, 그리고 실천의 차이가 미묘하게 사는 시간에 균열을 내면서 수습을 재촉한다. 잘 살고 있다.


올리브 그린과 오렌지 주홍 진한 브라운과 밝은 청록색 스모키 초록과 베이비 블루, 그리고 밝은 노랑이 섞여 내 시간의 한 층이 되었다. 색깔은 관계가 되고 의미가 되고 그 스스로 필요로 하는 가치를 가진다. 그 가치들을 모두 쌓아 담아두는 커다란 용기,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라 믿는다.


뭉툭해진 경계로 세상이 조금씩 더 추상화가 된다. 이미 어떤 면에서 사이보그가 되어버린 나는 카메라를 통해 날카로운 시간의 선과 꼭짓점을 느낀다. 기계로 살고 사물이 주는 안정감에 의존해서 조금은 덜 넘어지며 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내 생명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