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자 주방

22 [초단편소설] 흔적 (3-2)

by 서희복

단주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달걀을 곱게 풀어 고르곤졸라 치즈를 넉넉히 넣어 굽고 꿀과 요거트를 얹은 빛나는 노랑의 오믈렛은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 달콤하게 입안을 휘도는 꿀의 부드러움이 단주를 통해 채서에게 건너왔다.


싱싱한 딸기가 나오는 철에는 단주는 꼭지 딴 딸기를 씻어 냉동실에 넣어 두곤 했다. 생크림과 연유를 넣어 갈아 과육 식감이 풍성한 딸기를 살짝 녹였다가 썰어 커다란 스텐 볼 안에 천천히 저어 아이스크림을 들어 주면 채서는 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홍홍홍 기분 좋게 춤추듯 작업실을 돌며 가르랑거렸다. 단주가 항상 채서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몇 개월이 지나도록 채서가 음식을 하거나 심지어 설거지조차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주는 항상 채서 앞에서 행복해했고 채서도 행복한 단주 앞에서 기뻤다. 지 단주의 뒷모습에 그 행복과 기쁨을 새겨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채서가 뭔가 단주를 위해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단주는 한사코 자기 일이라며 주방을 내주지 않았다. 채서가 고작 하는 건 아일랜드 식탁 수도를 쫄쫄 틀어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을 씻어 얇게 저미는 일이었다. 채서의 접시에는 언제나 서너 개의 큼지막한 레몬 슬라이스가 있었다.


행복에 겨웠던지 기쁨에 따라온 흥분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던지 기역자 싱크 앞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단주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외로움이 차오기 시작했다. 백허그를 하면 단주는 다정히 돌아서 꾹 등을 다독이며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채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도 사랑한다거나 조금만 기다리면 맛나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 말했으려니 생각했다. 채서가 다 가지고 싶은 단주를 마주 볼 수 없는 시간이 쓸쓸했다.

단주가 1층으로 책 작업을 하러 내려가면 채서도 그녀의 종이 앞에 서서 가슴속에서 꺼내고 싶은 이야기를 지었다. 그러다가 단주의 기역자 크로 조용히 다가가 단주가 매일 만지고 씻고 닦는 커다란 차이나 도자기 접시와 반짝이며 면 천위에 다소곳한 수저와 포크 나이프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식기 수저 세트에 샘을 내다니, 사다가 깨끗이 다듬어 잘라둔 브로콜리나 양념에 절인 스테이크용 연어가 부러울 수 있다니 채서는 점점 소외감으로 뒤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단주의 따뜻한 걱정에도 채서는 점차 잠을 잃어갔고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단주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볼 때마다 야릇한 분노가 찼다.


작품에 대한 희망보다 단주가 주방에 서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네가 만지는 접시가 미워, 네가 닦는 나이프에게 샘이 난다고, 브로콜리도 만지지 마...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기역자로 꺾인 주방의 단주가 옆걸음으로 움직이며 채서에게 허락하는 게 고작 뒷모습이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옆모습이라는 것이 너무 서럽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말이다. 점점 현실이 왜곡되고 단주도 왜곡되고 채서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았다.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왜.


단주가 하는 모든 것들은 채서를 위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지만 태어나 느껴보지 못한 이상하고 미칠 것 같은 질투가 채서를 삼키고 있었다.


단주를 말려 죽일 것만 같았다. 채서의 텅 빈 눈에 단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칠 때마다 안아주는 것 토닥여 주는 것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채서는 더 이상 단주를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절실함에 허겁지겁 끝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네가 있어서 내가 아파. 네가 없어도 잘 살아보려고. 그래 그러려고. 영원히 가지는 마, 그런데 지금은 네가 떠나야 해.


그렇게 채서의 작업실의 기역자 주방에서 단주를 밀어내고 있었다. 살아야 해서. 단 3일의 말미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채서는 믿었다. 바보처럼. 단주가 아무 말 없이 그가 쓰던 나이프와 도마를 가져가고 하얀 도자기 접시를 가져가고 야채를 다듬어 담아두던 유리그릇들을 가져가고 나면 다 괜찮아 질거라 믿었다. 원래 채서는 혼자였으니까.


냉장고의 메모지가 사라진 그날 이후 단주는 그 주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가득했던 그 모든 것들이 기역자 주방 안에 그대로였다. 채서를 아프게 했던 그의 뒷모습과 얼핏 얼핏 보여주던 희미한 웃음기의 옆모습도 볼 수 없었고, 그의 1층 공방에서도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