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자 주방

23 [초단편소설] 흔적 (3-3)

by 서희복

한 달 넘게 작업실에 박혀 그림을 그리면서도 주방 싱크 위 그 어떤 물건에도 채서는 손대지 않았다. 주가 스쳤던 곳마다 채서의 허망한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 그녀를 향해 낮게 곡을 하는 것 같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오래 조용하던 건물의 1층과 2층이 한 사람의 분열적인 예민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단주가 사라진 지 두 달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1층에 왔다 가더니 문에 커다랗게 임대한다는 빨간 글씨가 붙었다. 경찰을 비롯해 단주의 가족인듯한 사람들이 2층에 올라와 채서에게 몇몇 질문을 했지만 그들에게 해줄 말은 없었다. 타인들의 눈에는 가깝게 차를 나누며 지내는 이웃정도로 보였을 테니까. 단주에게 그녀가 저지른 비현실을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 한대도 뭐라 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지나치며 기웃거렸던 단주의 1층이 비워지던 날 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주의 손길이 가득한 종이 재단기와 기다란 원목 서랍장이 실려 나갈 때 채서는 그녀가 곱게 누운 관이 화장장으로 보내지는 것 같은 그녀의 유리된 영혼을 마주했다. 일 년 넘게 단주와 보냈던 2층의 시간들이 먼지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채서는 아버지의 눈빛이 기억나지 않았다. 마주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표정도 어떤 감정도 느껴보지 못했다. 채서를 낳으며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어머니의 죽음이 채서 때문이라는 원망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말없이 의무를 다했다.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들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채서가 대학에 입학 후 기숙사에 짐을 풀고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서재를 열었을 때 채서가 마주한 건 아버지의 등이었다. 차갑게 늘어져 매달려 생명이 사라져 버린 아버지의 커다란 등이 채서의 모든 유년의 삶을 사라지게 했다.


온도가 달랐던 단주의 등을 채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 마음대로 손을 내밀었다가 가차 없이 벗겨져내리는 그녀의 공포를 마주할 수 없어 다시 어둠으로 그녀 자신을 내동댕이 친 거나 다름없었다. 단주의 주방에는 기역자의 먼지들이 쌓이고 있었다. 회한으로 오열하는 날들만큼이나 채서가 집중할 수 있는 건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검은 먹을 갈다가 손가락이 뜨거워지며 피나 날 때면 이상한 흥분에 눈물이 쏟아졌다. 용서할 수 있을까. 속죄가 될까. 그런데 누가 누구를? 채서 자신을? 아버지를? 아니면 단주를?


그가 마시던 차의 향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오래 저으며 만들어 주었던 하얀 쌀죽의 안개 같은 뜨거운 김도 모두 붙잡아 그녀의 화선지 위에 영원히 박아두고 싶었다. 오믈렛의 지글거리던 소리도 유리 용기를 따라 흘러내리던 딸기 아이스크림의 느릿한 유혹도.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잠들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붓을 들고 있는 그 시간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혼자니까 그렇게 절실히 혼자라서 가능한, 단주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독약 같은 고독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 또한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채서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경멸로 시작했던 작업들을 하면 할수록 단주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기를 잘 살아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채서가 결별을 통지했던 시간이 멀어질수록 그 비어진 공간의 허전함이 커질수록 단주에게도 채서가 큰 의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의 마지막 전시의 힘이 되었다.


1층의 단주가 모두 비워져도 아직 가득한 그곳의 흔적들이 채서를 살아있게 했다. 여전히 손대지 않은 단주의 기역자 주방에는 그의 숨결이 여전히 채서를 응원하고 있었다.


단주가 없는 거의 일 년이 다 돼가는 시간도 천천히 정리되고 있었다. 누구나 다 혼자다. 그리고 그 혼자를 거역하려는 욕망은 타인을 상처 내고 자신의 억압된 두려움에 필요 이상으로 가치를 두게 한다. 욕망과 상처를 봉합하는 일, 채서는 그런 아물림의 의식을 단주를 향해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단주의 순수에 고통을 준 벌을 채서 스스로에게 실행하는 시간을 기쁘게 맞기로 한 날이었다.


전시는 성공이었다. 마지막 전시날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채서는 다시는 보지 못할 자신의 그림들을 천천히 하나씩 마음에 넣었다. 마지막 그림이 걸린 기역자의 하얀 벽으로 돌아서면서 채서는 그대로 멈춰 섰다. 차의 향기를 형상화한 안개의 물빛을 세밀하게 그린 작품 앞에 누군가 오래 서있었다. 낯익은 등이 채서를 얼어붙게 했다. 두려움에 돌아서는 채서를 향해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저, 카모마일티 좋아하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