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엽편소설] 통하는 방식
율이 이곳에 이사 온 지는 한 달쯤 되었다. 꺾어진 에스자 모양의 민트색 건물 5층 1호에 멜빌 씨가 산다.
열쇠를 두고 나와 성급히 따라 들어간 멜빌 씨가 돌아보며 율에게 어디 사느냐 물었다. 5층 6호에 이사 왔어요. 서양 사람은 실제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머리는 진한 갈색인데 수염은 밝은 금색이다. 수염도 금발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나이스투미츄, 악수를 청하는 멜빌 씨의 손이 따갑다, 앗, 악!
그가 사는 501호가 꺾인 건물의 첫 번째 집이라는 걸 얼마 후에 알고는 멜빌 씨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인다. 그의 창문이 세로로 길게 나있고 율의 베란다 통창 전면으로 다 들어온다. 멜빌 씨는 율의 부분집합이다. 멜빌 씨는 율의 손바닥 위에 있다.
책상 앞에서 일어날 때가 됐는데 율이 생각하면 멜빌 씨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난다. 율을 한번 쳐다보는 것도 같다. 가끔 율은 그녀의 초능력이 멜빌 씨를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멜빌 씨에게 계속 말을 걸어야겠다.
어쩌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건가 하는 날이 있지만 이내 멜빌 씨는 책상 위로 눈을 떨구고 무언가에 열중한다. 율이 멜빌 씨를 바라보고 있는 날엔 어김없이 십 분쯤 후에 그가 일어나 율을 바라본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이상한 울림에 의아해하며 서로 마주 서서 응시하고 있는 날이 늘어난다.
멜빌 씨의 책상은 창문에서 꺾어져 있는 벽 쪽에 붙어 있다. 사십오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팔로 턱을 고이고 일을 한다. 그래서 멜빌 씨의 왼쪽 뺨은 항상 율에게 열려있다. 율은 거의 정사각형인 그녀의 베란다 통창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
멜빌 씨의 세로로 긴 직사각형 창에서 가끔은 어떤 소리가 빛으로 오는 이상한 상상도 한다. 선이 오거나 속삭임이 오거나. 선을 그어 들어가지 말라는 건지, 선을 이어 서로 통하게 하려는 건지, 무엇을 전하려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런 선이 느껴질 때 율은 21년 산 스프링뱅크를 꺼내 마시곤 한다. 딱 35밀리의 위스키는 빈속의 율을 잠들게 한다. 베란다 앞 소파에는 햇살이 가장 먼저 닿는다. 멜빌 씨가 자기 창 앞에서 율을 지켜보고 있을 테지만 그때 율의 눈꺼풀은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
꿈을 꾼다. 조나단 멜빌이에요. 저는 서율입니다. 프랑스에서 온 멜빌은 척박한 영지라는 의미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정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글을 씁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들려줄 글을 쓰고 있어요. 율이예요. 자연으로부터 오는 섬세한 울림이라는 의미예요. 栗, chestnut, 밤이라는 자연의 소리 같은.
스코틀랜드는 뿌리를 중요하게 여겨요. 이름보다는 성으로 불리면 혈통이나 역사에 더 자부심을 느끼죠. 그렇군요, 멜빌 씨. 율은 개인적인 소망을 담은 이름이에요. 지금을 충분히 살라는 부모님의 바람이기도 해요. 자연의 소리대로 살아가라는. 우린 다른 것들이 많군요. 중심이 다르고 가치도요.
501호의 성과 506호의 이름이 율의 꿈으로 기억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꿈이라니. 밤에만 꾸는 꿈이 아니라 어떤 이끌림으로 완성되는 스토리텔링 같은 그런 시간에 익숙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산 위스키와 스코틀랜드 성을 가진 미스터 멜빌 씨가 율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율은 궁금하다. 그가 어떤 글을 쓰는지. 아껴두었던 에드라두어를 꺼냈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희귀한 위스키다. 왠지 이 스카치위스키가 멜빌 씨와 잘 어울릴 것 같다. 꿈에 들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이 될지 궁금하다. 땡큐 노트를 써서 병에 걸었다. 행복한 시간.
5층의 끝을 따라가 꺾인 부분마다 있는 문을 열면 그 끝 1호에 멜빌 씨가 산다. 1, 2, 3호가 하나로 묶여 4, 5, 6호와 하얀색 철문으로 나뉘어 있고 율이 사는 뒤쪽에 7, 8, 9호로 가려면 다시 하얀색 철문을 지나야 한다. 멜빌 씨가 사는 쪽 문이 열리지 않는다. 지나가던 5호가 율에게 그런다, 거긴 아무도 살지 않아. 상징적이지.
5호가 계단으로 사라지고 1, 2, 3호라 쓰여있는 하얀색 철문 손잡이를 다시 돌리려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율이 사는 그 이웃에 멜빌 씨가 살고 있어야 하는데. 율은 첫 번째 하얀 철문 아래에 위스키를 두고 돌아왔다. 멜빌 씨가 거기 산다는 건 율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니까.
6호로 돌아오는 길에 7, 8, 9호 입구의 철문에 들러 손잡이를 돌려본다. 돌려지지 않는다. 율이 사는 에스자 건물의 머리와 꼬리는 율이 들어있는 몸통의 상징이라는 건가. 5호를 만나면 다시 물어봐야지. 그것도 괜찮기는 하다. 어떤 상징의 중심에 사는 율이 조금 특별하다는 의미니까.
501호에 불이 켜진다. 멜빌 씨가 율을 향해 위스키 잔을 든다. 율도 천천히 위스키를 따른다. 멜빌 씨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조금 다른 차원의 몽롱함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