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되는 것으로부터

맹목의 벼랑

by 서희복

스스로의 울타리는 어디에 치느냐에 따라 위험의 경계를 결정한다.


시간에 드리운 그림자는 즉각적인 소통으로 일소할 수 있다. 잘 지내나요. 이래서 거기 가요. 그라데이션으로 모호한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린다. 일순간 명쾌해지는 오늘의 타임라인이 밉지 않다.


랜선의 불통에 대해 감정선을 정리하면 가장 이성과 논리에 가까이 차분하다. 의도적 조근조근.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억양에 사차원으로 초대된 양 비모국어 화자를 향해 최대한 정확하고 여유 있는 응대를 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저를 3분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단 몇 개의 이국적이고도 매우 친절한 어조로 어떻게든 상관없다는 식의 해결 방식으로 접어든다. 아다르고 어다르니 당신은 오늘 당신의 회사를 구하는 거다. 친절한 사람이 좋다.


공간의 비자발적인 이동에 대해 과거의 색깔을 현재로 거슬러 올린다. 이미 그땐 지금이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지 눈빛을 꼭 보리라. 말이 없어도 소통의 결은 예민하면 할수록 다양하다. 얼굴 근육의 어디쯤이 치켜올려졌는지, 입술에 괜한 침을 바르지는 않는지, 바른 각도로 꽂히는 혀가 맞는지, 모든 것은 찰나의 태도로 선택된다.


입꼬리의 각도에 따라 내 손이 어느 높이로 올려지는지에 대해, 열리는 곳으로부터 흐물거리며 나오는 것이 모음일지 자음일지에 대해, 목을 구부렸는지 허리를 구부렸는지에 비루함이나 뻔뻔함을 재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나의 태도까지 합하여 오늘 그 공간이 얼마나 풍성하게 채워질지가 기록된다. 그 전문가의 깊고 촘촘히 찌든 왁스 냄새가 가득한 곳에 대한 긴장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의 강도가 글의 완성도와 비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맹목이 아니기를 바란다. 쓰고 로그아웃하거나 읽고 라이킷을 안 하거나 로그아웃 버튼과 일 밀리미터쯤 거리에서 움찔거리거나 누르고도 다시 로그인의 유혹을 벼락같이 맛보는 것은 쓰디쓰다. 지겹고 지루하고 못 참겠고 권태스럽다. 그걸 견디려 더 쓰는지도 모르겠다. 비위상하는 순간들, 버려지는 순간들, 결국 나를 거둬들일 손은 나뿐이라는 헛웃음, 그런 쓴맛 속에도 계속 써야 해서 그 터질듯한 경계를 오고 간다.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철학이 버티라며 휘날리는 그 끝에서 그래도 살아라 보다는 부존재의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시간을 외면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라가 더 진심으로 들린다. 가여운 고의의 무심함들, '그래도...'


오늘의 매뉴얼을 거칠게 읽는다. 저 거친 사이에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춤출지 오늘은 오늘의 보따리를 풀었다 쌌다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