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책 속에 끼어있던 자신을 만나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 이름을 말하면 곱씹어 둔다. 그를 사랑하므로. 사물이나 사람의 명칭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삶에서 특별한 안간힘이 더해진다. 조금은 진한 농도로 산다.
세상 경쟁의 소굴에서 일반 대중이나 비평, 저명한 이름을 걸고 나온 글들이 세상을 벽지처럼 바르고 서로 도드라지려 억지 빛을 만든다. 두꺼운 실크 벽지 뒤에서 조용히 잔잔히 자기를 사는 글들을 읽고 답한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저자를 도서관에서 찾아 나온다. 다 닳은 오렌지빛 표지에 이 제목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읽는다. 표지를 읽고 EM으로 시작하는 ISBN을 훑는다.
글씨체와 제목이 놓인 위치 저자가 그 위에 박혔는지 아래 찍혔는지, 출판사의 이름이 대문짝인지 소소하게 구석에 겸손한지, 결국 왜 나는 이 모양으로 책을 읽는지, 겉표지를 오래 읽다가 지치곤 한다.
용기를 더 내어 저자의 삶에 대해 읽는다. 부르주아인지 프롤레타리아인지 얼마나 자본적 여유가 있었는지 땀을 흘리는 만큼만 삶이 허용되었는지에 대해 습관처럼 행간으로 들어간다. 배부른 자의 기름 때는 경고의 깜빡임이다. 베고픈 자의 절절함에 손을 뻗는다. 권력이든 돈이든 비열함이든 천박함이든.
기증자의 이름을 지나 번역의 거리가 확연한 영한 제목의 비교를 지나 출판사의 가장 진한 명도를 눈치챈다. 그랬다는 거지. 이름을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곳에서 명성을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경쟁 꼭대기를 거머쥔 저자의 쓰기 행실과 쓰기 직업에 대한 말도 아닌 글도 아닌 중간쯤 어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거다.
그러다가 KF94 마스크 봉지의 찢어진 위 꼭지를 발견한다. 북마커. 사는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이상한 놀라움에 오래 흥분한다. 이 글을 누구에겐가 바친다고 쓴 곳까지만 읽은 걸까. 전부 다 읽고 저자와 이 글이 헌납된 영혼의 관계에 오래 머무른 걸까. '키란 데사이*에게, ' 그의 연인이었던.
부드럽게 찢겨나간 북마커에는 흰 바탕에 형광색의 강렬한 주황으로 박힌 로고와 글이 있다. 꿈틀대는 열기를 품고 묵묵히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눈치챈다. 목차로 옮기며 동시에 둘이 읽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읽는 것에 대하여 쓰는 것에 대하여, 어쩌면 진저리 쳐질 사소한 습관까지도.
자문자답을 위해 읽고 쓴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
*: 오르한 파묵의 옛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