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F]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by 정형석 감독
사실은 모두 그렇게 살면서 그녀를 이상하다고 한다.
집 밖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전직 군인이었다며 거들먹거리는 할아버지에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뒤돌아 눈 감고 거울 밑에 달린 철제 바를 있는 힘껏 잡고 서 있다. 말 한마디도 숨소리 하나도 같이 섞이기 싫은 일종의 경직된 타인으로 모른 척한다. 나는 그에게 나이도 어린것이 웃어른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싹수없는 사람으로 각인된다.
현관을 통해 그와 갈라져 경비 아저씨와 마주친다. 항상 힘들어 보이고 주민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분에게 다소 높고 밝은 톤으로 인사를 한다. 분주히 눈을 치우고 있던 아저씨는 지나가다 멈춰 서서 자신에게 인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친절하고 따뜻한 주민이 된다.
버스 정거장으로 서둘러 걷다가 갑자기 한 중년 여성이 다짜고짜 팔을 벌려 가로막으며 시청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내 뜻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멈추어진 짜증으로 잘 모르겠다는 대답 한마디 하곤 서둘러 부인을 지나친다. 제대로 말귀를 못 알아들은 그 부인은 내가 자기를 너무 귀찮아해서 일부러 말을 빠르게 하고 지나간 별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작은 애완견을 안고 버스에 탄 할머니가 애완견을 자꾸 내쪽으로 흔들며 개보고 인사하라고 말을 한다. 속으로는 개한테 무슨!이라 생각하면서도 할머니의 애처로운 관계 형성 노력에 마지못해 그 작은 강아지를 마주 보며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고! 이뽀라, 얘 이름이 뭐예요? 할머니의 밝은 화색에 큰 보람을 느낀다. 나는 동물을 무척 사랑하는 마음 고운 사람이 된다.
단 몇 시간에도 싹수없었다가 친절하고 따뜻했다가 싸늘했다가 마음씨 고운 여러 버전의 나가 된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자신의 비일관적인 인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진정한 나의 버전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과 마주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른 페르소나로 들어가려는 여자가 있다. 재미있는 곳에 더 오래 머문다. 연극, 진심으로 그 역에 몰두하면 그가 될 수 있을까?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이력서에 쓴 혜리, 서울대 졸업생이 아닐 수도 있는 지숙, 연극 속의 방탕한 창녀 명진, 효심이 지극한 성아,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하게 되는 정혜, 모든 소리에 강박적으로 예민한 민희, 카페에서 일하는 정숙, 성실하고 착하고 따뜻한 주경, 알코올 중독자로 주사가 쌍욕인 경미...
만일 이름마다 다른 페르소나가 주어진 연극에서 1인 10역을 한다면 그녀는 잠시나마 자신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타인을 충분히 재미있게 살아낸 것일까. 이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한다면 저 10개의 페르소나 중 진실이라고 믿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무엇인가 하는 끊임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는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라고 생각하는 '그'는 잠시 발현되는 이미지 같은 것이다. 매일 매시간 매상황, 어떤 관계 앞에 설 때마다 달라지는 자신은 미세하게 순간마다 달라지는 구름 같은 것임을.
그녀의 선배가 전하는 낮고 수줍은 외침, '나를 지켜야 해. 자기 자신을 잃으면 안 돼.' 차분히 정돈된 듯 보이는 지금의 자신이 진정한 '나'인 건가. '나'이고 싶은 건가.
내 안에서 내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카멜레온 일 뿐, 변하는 관계에 끼워 맞추어질 한 개 퍼즐 조각 같은 것이다.
박원장은 이 영화를 감독한 '정형석'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재수 없이 거들먹대며 세상을 반말 찌꺼기쯤으로 아는 미숙하고 얄팍하고 천한 관음증을 드러내 보이는 전형적인 속물 아저씨 연기도 잘하는 감독,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