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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완 Jul 18. 2023

다시 학원으로...

어설픈 경험은 뼈 아픈 실수를 불러온다 

드라마작가의 꿈이 희미해지고 헤드헌터를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번역으로 먹고살고 있던 2022년의 봄 무렵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지도 1년 남짓 되었다. 또 여전히 매주 주말에 성당 활동을 하러 서울에 갔었는데 봉사하고 있던 단체도 인원이 많이 늘었고 자리 잡을 때까지만 다니겠다고 계속 이야기해 두었던 터라 미련 없이 후련하게 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같이 고생했던 동료들은 지금도 연락하며 그때를 추억하는 좋은 인연들이 되었다. 당시에는 기쁘게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슨 의지로 그렇게 열심히 버스 타며 운전하며 다녔나 싶다. 요즘엔 지인들을 만나러 서울을 올라갈래도 여러 번 고민하게 되고 한 번 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최소 2건 이상의 약속을 잡아서 다녀온다. 1년 간 지겹게 드나들었던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이제 가족들과도 어느 정도 적응기를 마치고 고향에 정을 붙여서 들뜬 마음이 안정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루틴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살도 찌고 심신이 약해지면서 우울한 감정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번역도 꾸준히는 했지만 체력이 되는 만큼만 했고 양질의 일감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프리랜서라는 점이 시간을 조절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부탁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결혼한 남동생도 고향에 살고 있었는데 와이프가 둘째를 낳을 무렵에 개인사업을 시작했고 가게를 봐줄 사람이 없어 나한테 부탁을 해왔다. 어차피 번역은 아무 데서나 해도 되는 일이니 가게에서 번역하면서 일 좀 잠깐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부모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조카도 부모님께 맡겼었는데 나도 부모님 하고 같이 살고 있으니 서로 도와야 하지 않는가. 애 보는 게 쉬운 일도 아니라 체력이 약한 엄마는 혼자 하루종일 손자를 돌보면 병이 나셨다. 물론 동생은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을 것이고 부모님과 누나까지 끌어들여서 도와달라고 하는 점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나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단지 쉬엄쉬엄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보다 가족 일을 우선 시 해야 하나 하는 불편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그래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가게를 봐주기 시작했고 산후조리가 어느 정도 끝날 때까지만 봐주려고 했는데 계속 맡길 것 같은 눈치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에서 일하면 조카들이 앞으로 더 자주 올 테고, 동생 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번역하려니 이도저도 안될뿐더러, 사업 초기라 예민해져 있는 동생하고 한 공간에 있으면서 감정 상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내가 마음이 건강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나도 자리를 못 잡고 있어서 우울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자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게 도와주다 의가 상하는 일은 더욱이 없어야 했다.  

 

오랜만에 채용사이트에 들어갔는데 고향에도 영어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어학원 초등부 영어강사였는데 서울에서 잠깐이지만 다른 어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기억이 좋았기에 망설임 없이 지원을 했다. 면접을 보러 가서 원장님께 혹시 파트타임 강사로 근무할 수 있는지 문의드렸는데 풀타임으로만 채용하고 있다고 하셨다. 영어 번역을 아예 접을 수는 없었기에 고민이 됐는데 서울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니 충분히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여도 꽤 괜찮았다. 학원 강사도 개인사업자로 근로계약을 한다. 4대 보험의 혜택은 없지만 같은 급여라면 세금을 3.3%만 제하기 때문에 실수령액이 더 많다. 8월 마지막 주에 교육을 받고 가을 학기부터 일하기로 했다. 그렇게 동생 가게는 딱 3개월을 봐주고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되었다. 


8월 말이 다가왔고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3일 정도는 본사 온라인 교육을 듣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머지 며칠은 기존 강사가 자투리 시간에 교육을 해줬는데 서울에서 일했던 어학원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교재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PPT로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이 어학원은 수업을 강의나 대화식이 아닌 흥미를 유발하는 액티비티 (놀이) 위주로 진행하기 때문인데, 본사에서 제공하는 표준 PPT가 있기는 하지만 강사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사용하는 액티비티도 다르며 수업방식도 다 달랐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수업 첫날 엄청나게 당황해 버렸다. 내가 맡아야 하는 반의 강사를 쉐도잉 하면서 교육을 받는 게 아니고 본사 직원에게 교육을 받기 때문에 발생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첫 수업날이 되었다. 오전에는 여전히 뉴스 모니터링 번역을 했는데 보통 10시 반에서 1시 사이였고, 어학원은 1시부터 9시까지 근무였다. 내가 맡은 반은 5개 반이고 레벨로 따지면 아주 초급부터 고급 레벨까지 있었다. 원장님은 여러 지역의 분원을 맡고 계셨는데 학생들이 많아 강사도 많고 업무가 제일 바쁜 옆도시 분원에 거의 상주하셨고, 다소 학생이 적은 이곳 분원은 데스크 실장님과 기존 강사, 나 이렇게 세 명이서 근무를 했다. 기존 강사에게 배웠던 대로 준비를 해갔는데 막상 수업을 들어가 보니 당황스러웠다. 기존 강사가 가르치던 반의 아이들은 알아서 척척 했었는데 이 아이들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기본 가이드라인과 정해진 진도는 있지만 강사마다 수업 방식과 사용하는 액티비티가 다 달라서 이 아이들은 내가 준비한 액티비티를 몰랐던 것이다. 액티비티는 칠판에 붙는 공, 카드, 파리채, 미니 보드 등 다양한 소품으로 진행한다. 게다가 영어를 잘 못 알아 들었다. 그나마 가장 높은 레벨의 수업반 아이들은 영어 수준이 높아서 괜찮았는데 여전히 수업 방식은 아이들에게 생소했던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선생님이 오면 새로운 수업 방식과 액티비티에 아이들이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잘 알려줘야 했고 일정기간이 지나 서로 익숙해지면 공만 꺼내도 알아서 척척 맞춰지는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맞춰서 수업을 진행했고 잘 따라와 주었다. 하루에 커버해야 할 수업량도 만만치 않은데 수업 방식을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니 너무 힘들었다. 5개 반 마다 기본 교재 1권과 읽고 와야 하는 동화책 1권 (한 학기 동안 기본 교재는 2권, 동화책은 4~6권 정도)이 있고, 3개 반은 중급/고급 레벨이라 스피킹 교재와 문법 교재가 추가되었다. 원어민 강사는 없었고 한국인 강사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영역을 전부 담당해야 했다. 학기 중에 아이들마다 3~4개씩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주제를 주면 종이에 영작해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해서 내야 한다. 영작은 수업 중에 하거나 숙제로 해오면 스팰링과 문법을 수정해 주고 최종본을 종이에 옮기게 한다. 글씨를 이쁘고 깔끔하게 써온 작품을 뽑아 반 마다 한 명씩 학기 말에 상장과 선물을 준다. 주제를 정하는 것도 종이 템플릿을 만드는 것(템플릿은 샘플이 있긴 하지만 수정이 필요하다)도 나의 몫이다. 수업 중에 단어시험을 보면 바로 채점해서 내부 DB에 아이들마다 점수를 입력해야 하고 커트라인 이하인 아이들은 표시를 해두면 데스크에서 확인 후 남겨서 재시험을 치르게 한다. 하루에 저학년은 90분 수업, 나머지는 120분 수업이고 중간에 쉬는 시간은 별도로 없으며 강사의 재량으로 한다. 액티비티 위주의 수업이라 아이들이 집중은 잘한다. 다만, 같은 레벨이라도 다 달라서 교재 문제풀이 시간 등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산만해지기 때문에 잘하는 아이들은 추가로 작업할 수 있는 인쇄물을 또 만들어서 배포해주어야 한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 전에 쉬는 시간은 없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이들 줄을 세우고 대기하는데 데스크에서 학원 차량이 준비된 것을 확인 후 데리고 나간다. 그럼 대기 중이던 다음 수업반 아이들이 들어온다. 아마도 이 본원이 타 본원에 비해 학생 수가 적어서 강사 2명과 데스크 직원 1명뿐이라 운영 방식이 이렇게 밖에 안되나 보다 생각했다. 강사는 수업 중간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그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장실이 한 칸이었다. 5개 반 레벨이 다 달라서 퇴근하면 집에 가서 매일 수업 준비를 했고 주말에는 PPT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타 어학원에 비해 급여가 높긴 했지만 업무 강도에 비하면 높은 게 아니었다. 물론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익숙해지면 수월해지고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전에 나의 몸은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나고 말았다. 


수업 시간에 화이트보드를 많이 쓰는데 수업 설명할 때도 쓰지만 액티비티를 할 때 조별로 점수를 계속 적어줘야 한다. 아이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하는지 엄청 열심히 참여한다. 두 달 뒤부터 겨드랑이와 어깨가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결리는 정도가 아니라 팔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용하다는 한의원에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서 나아지긴 했는데 한 동안 고생했다. 스트레스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옆반 기존 강사 선생님께 물어보는 것도 한계가 있고 수업 외로 처리해야 하는 기타 행정업무도 많았다. 수업이 다 끝나면 시스템 상에서 잔업 처리를 해야 하고 수업 내에 끝내지 못한 아이들 숙제 체크와 채점을 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상담 차 전화도 해야 하며 학기가 끝나면 아이마다 시험결과와 코멘트를 각각 작성해서 시스템에 남겨주어야 한다. 핼러윈 때는 하루종일 행사를 진행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각 반마다 캐럴송과 안무를 준비해야 한다. 반년이 지나면 다 적응될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한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고 싫은 소리나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나 더 이상 못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영어 번역을 병행했던 것이 체력 소진에 기름을 부었던 것 같다. 그래도 불행인 지 다행인 지 먼저 번역을 못하겠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두 군데의 정기 기업 고객의 번역 일감이 끊기게 되었다. 한 군데는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종료로 끝났고, 다른 한 군데는 1년에 한 번 있는 행사가 끝나고 번역이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장님께 죄송하다고 정말 너무 힘들다고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원장님께서 나를 과대평가하신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저 학원 상황에 맞게 배정해 주신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파트타임으로 일해보라고 제안을 주셨고 좀 더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 이미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새로운 강사를 구할 때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가자 체력이 떨어지면서 면역력이 약해졌고 감기는 평생 잘 걸리지도 않는데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았다. 주말에 고열이 나서 응급실에 실려갔고 코로나 판정을 받았다. 원장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월화 이틀은 타 본원의 다른 강사가 대체 수업을 해주었고 수목금은 줌으로 수업을 했다. 온몸이 아파서 이틀은 거의 앓아누웠는데 약의 기운인지 아니면 수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인지 수목금에는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았다. 그런데 주말에는 속이 안 좋아서 토하는 바람에 시체처럼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있었다. 다음 날 링거를 맞고 수업에 들어갔다. 


첫 두 달간 수입은 꽤 괜찮았다. 오전에는 번역을 하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영어로 가르치느라 하루 종일 고생은 했어도 오랜만에 통장에 월급이 쌓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세 달 째부터는 자연스레 번역 일감이 끊겨서 학원에 올인했고 새로운 선생님이 구해져서 총 다섯 달을 일하고 그만두었다. 적어도 1년은 근무할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다섯 달 만에 그만두게 돼서 원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면서도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면접 시 번역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파트타임이 안된다고 해서 풀타임으로 입사를 했지만, 학원 경력이 거의 없는 내게 레벨이 각기 다른 5개 반을 주시고 고급 레벨 반은 기존 선생님도 가르쳐 본 적이 없는 레벨이라는데 내게 맡기시고 학생들 총인원도 오히려 기존 선생님보다 훨씬 많았다. 강사가 두 명밖에 안 돼서 배정하기가 쉽지 않으실 수도 있었겠지만 기존 선생님의 편의를 많이 봐주신 듯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나가떨어지게 됐으니 서로 손해를 본 격이다. 파트타임으로 시작했거나 풀타임이라도 비슷한 수준의 레벨인 수업 반들을 맡았다면 좀 더 오래 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짧은 기간에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역시나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은 진리다.  


아무튼 타 어학원에서 파트타임 영어 강사로 잠깐 일했던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다시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국에는 그 어설픈 경험이 뼈아픈 실수를 낳게 되었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다시는 고정 월급을 받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또 한 번 다짐했다. 어차피 힘들게 노력할 거면 내 일을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안전지대를 찾아 기어들어오는 나에 대한 경고였다. 


학원을 그만두자마자 다른 것은 할 겨를조차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필라테스 50회를 끊었고 결론적으로는 운동을 시작하게 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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