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12시쯤 잤는데도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숙소인 체육관 안은 아직 취침 중인 순례자들의 새근새근 숨소리와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평소에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잘 못 자는 편인데 얇은 침낭 하나에 의지해서 잤어도 크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에어컨도 없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밤에는 쌀쌀하기까지 했다. 한 여름 날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행을 할 때는 그날의 경험과 느낌을 밤에 잠이 들기 전에 꼭 일기로 쓰는데 어제는 너무 늦어서 못쓰는 바람에 일찍 일어난 김에 쓱쓱 써내려 갔다.
7시쯤에 슬슬 옆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단짝을 깨웠다. 1분 1초가 아까운지라 도보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몰에 가보기로 했다. 몰 안에 콘티넨테(Continente)라는 대형 체인 마트가 있는데 8시에 오픈한다고 한다. 딱 맞춰서 도착해 둘러보는데 신선한 과일, 샐러드, 채소에 요거트까지!!! 아주 눈이 돌아갔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해서 납작 복숭아, 바나나, 블루베리, 요거트, 당근 (배변을 위한), 생수, 커피까지 구매했는데도 둘이 합쳐 15유로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납작 복숭아는 진짜 어찌나 맛있던지!!! 요거트에 블루베리를 뿌려서 먹는 그 맛 또한 말해 뭐 해.
아침식사는 주스, 치즈가 들어간 빵, 그리고 사과였다. 어제 저녁식사보다 맛있었다.
오늘은 아침 9시에 운동장에 모여서 다운타운에 있는 광장에 있는 무대로 이동해 교구대회 공식행사 개막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참고로 교황님과 함께 하는 본 대회 때는 WYD에 참여하는 전 세계 각국 청년들이 다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모이지만, 사전에 치르는 교구대회는 리스본 인근 소도시들로 흩어져서 참가한다. 우리 교구는 타비라에 연락해서 온 것이고 한국에서 온 다른 교구들은 또 다른 도시에서 교구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전체 순례자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각국을 상징하는 국기를 들고 단체티를 입은 나라도 있고 안 입은 나라도 있었지만 나라별로 서 있었다. 국기를 들고 마치 퍼레이드처럼 행군을 시작했다. 현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손도 흔들어주고 인사도 해주었다. 광장 무대 앞에 나라별로 앉았고 사회자인 여성 분 혼자 진행도 하고 3개 국어로 통역도 했다. 각 나라 소개를 하고 주교님, 시장님 인사말씀도 있었는데 사회자가 3개 국어로 통역하느라 엄청 분주해 보이심... 그다음에는 아침기도 시간을 가졌고 각 나라에서 대표로 나와 기도를 읽었는데 우리 교구는 대표 청년이 영어 기도문을 바쳤다.
그리고 사회자가 전체적인 일정을 안내해 주었는데 오전 중으로 공식행사를 마치고 무더운 한낮은 자유시간, 그리고 저녁식사를 한 뒤 공식행사를 이어서 한다고 했다. 포르투갈도 시에스타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빡빡한 일정으로 전체가 다 같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인지 예상치도 못한 자유시간에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다만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교구 청년들 대다수가 단체로 엄청 빡빡하게 다니는 줄 알고 아무것도 알아보고 오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그래서 더 미지의 이곳에서 매 순간을 즐길 수 있었지만 말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11시경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라는 미사 준비를 위해 4시 반까지 숙소에서 모이기로 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급히 검색을 해봤는데 해안도시고 해변이 이뻐서 유럽 사람들이 바캉스를 많이 온다고 하는 글이 보였다. 단짝 자매와 유일한 언니와 셋이서 해변을 가기로 하고 위치를 찾아보던 중에 무대 밑에 사회자가 보여서 길을 물어보았다. 광장에서 3분 정도만 걸어가면 선착장이 있는데 거기서 보트를 타고 타비라 섬에 가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실행력 갑인 우리. 냉큼 선착장으로 가서 타비라 섬 보트 왕복 티켓을 구입했다. 금액은 2.5유로! 30분마다 보트가 있다.
보트를 타고 약 15분을 달려 타비라 섬에 도착!
배가 고팠던 우리는 일단 식당에서 점심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선착장에 내려서 소나무 숲을 지나 들어가니 식당들이 보였다. 야외 테이블이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데로 골라서 들어갔다. 목을 축이기 위해 단짝 자매는 모히또, 난 피나 콜라다, 언니는 에이드를 시켰고 메인 메뉴는 피시 앤 칩스, 치킨윙, 새우튀김, 그리고 구운 고등어? 가 들어간 샐러드를 선택했다.
어제 저녁식사 이후에 먹는 끼니라 그런 지 맛있게 먹었다. 피시는 약간 튀김이 눅눅한 스타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피나콜라다는 워낙 좋아하니 말할 필요도 없고!
배를 든든히 채운 뒤 바로 앞 해변 모래사장에 앉았다. 수영복 탑을 벗어젖히고 당당하게 앉아 있거나 수영하는 여자들도 보였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상하거나 음흉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 없이 늘 있는 일인 양 담담했다. 이런 자유로움이 좋았는데 너무 오랜만에 느껴본다.
바다에 발을 담갔는데 정말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이렇게 차가운 바다는 처음이다. 그러나 용감한 나의 단짝 친구가 앉아있을 수 없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멋진 여자!
그러더니 나를 부르며, ‘언니 안 들어왔다가 가면 후회한다’ 이러길래 매 순간 즐기기로 한 나의 다짐을 배신할 수 없어 용기 있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평소에 더위는 엄청 타는데도 찬 물에 샤워 못하고, 목욕탕 냉탕도 못 들어가는 내가 이 얼음장 같은 바다에 들어왔다니! 하는 순간 딱 2초가 지나자 엄청난 시원함과 쾌감이 몰려왔다. 얼굴 내놓고 유일하게 떠 있을 수 있는 배영으로 유유히 힘을 빼고 있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째졌다 한 마디로.
한 30분 정도 놀았을까. 단체티에 반바지를 입고 와서 좀 아쉽긴 했지만 바다에서 나오니 한낮의 태양에도 시원함이 계속 느껴졌다. 더 있고 싶었지만 숙소로 가야 할 시간이다.
발에 화상 입는 거 아닐까 싶은 뜨거운 모래사장을 지나 다시 보트를 타고 선착장에 내려서 15분 정도 걸어 숙소로 왔다. 후딱 씻고 나와 건물 앞 잔디에 다들 모여있었는데 급식소에서 점심식사를 한 청년들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볶음밥이 나왔는데 맛있었다고 한다!
다 같이 오늘 미사에 부를 성가 연습을 했다. 역시 성가는 야훼이레 청년 성가가 최고인 듯. 부를 때마다 전율이 느껴진다. 다시 광장으로 이동해서 어제저녁에 갔던 성당에 도착했다. 우리는 한국말로 미사를 집전하기로 했다. 6시에 미사가 시작되었고 우리 교구 신부님들과 짐바브웨 신부님들까지 같이 입장하셔서 제단으로 올라가셨다.
어제 짐바브웨에서 보여준 신나는 축제와 같은 느낌의 미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지만 감미로운 기타 연주에 맞춰 다 같이 부르는 청년 성가가 천사들의 합창처럼 들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 귀에도 아름답게 들릴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우리 교구 신부님들이 다 내려오셔서 일일이 모든 청년들과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은총이 가득했던 미사가 끝나고 공식 일정 집합 시간인 밤 9시 반까지 모이면 되니 저녁식사는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하셨다. 단짝 친구와 나는 현지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광장으로 나갔고 다른 두 자매들도 합류해 선착장 근처에서 봤던 뽈뽀(pulpo; 문어요리) 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뽈뽀는 포르투갈 대표 음식이다. 우선,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시키고 각자 다른 문어 요리를 주문해서 먹어보기로 했다. Octopus curry(문어 카레), Octopus tempura(문어 튀김), lagareiro style octopus(문어 야채 볶음), octopus rice(문어를 곁들인 밥)를 주문했다.
진짜 너무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 한국 문어는 쫄깃한 식감이 강한 반면에 포르투갈 문어는 그냥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나같이 다 맛있었는데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그중 단연 으뜸은 lagareiro style octopus!!! 단짝 친구가 메뉴판에 첫 번째로 쓰여 있는 메뉴가 시그너쳐라며 골랐는데 아주 굿 초이스!
식당 이름은 Polvaria-Joao belhi이고 강력 추천한다! 와인 포함해서 1인당 20유로 정도 나왔으니 가격도 나쁘지 않다.
입가심으로 광장에 있는 젤라또 가게에 들러서 여러 맛이 나는 젤라또를 주문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여기는 Tavira Romana라고 항상 사람들이 줄 서 있다.
숙소로 돌아와 다 같이 모여서 각국 국기를 들고 퍼레이드처럼 행렬을 지어 시내를 가로질러 다시 광장 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우리를 볼 때마다 타비라 현지 분들께서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광장을 지나 시계탑 쪽으로 올라가 보니 또 다른 무대가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단짝하고 시계탑에도 한번 가보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오게 되다니!
오늘은 각 나라마다 나와서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변경이 됐는지 갑자기 나라별로 공연이 시작됐다. 우리도 두 팀으로 나누어서 사전 준비모임 때 장기자랑 연습을 해 두었기에 갑작스럽긴 해도 드디어 무대에 올라가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변경된 일정 때문에 우리가 당황할 것이라 생각하신 건지, 아니면 현장에서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내부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만 공연을 안 하게 되었다. 오늘 밤은 방청객이 된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양 팀 다 BTS 노래와 국악성가로 춤을 준비했는데 좀 틀리더라도 무대에 올라갔다면 반응이 뜨거웠을 텐데 말이다. 다른 몇몇 나라도 준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왔는데 말이지. 그래도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밤이 늦어지자 날씨가 엄청 추워졌다. 오후에 수영을 하고 와서 그런지 갑자기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맨 뒤쪽 바닥에 앉아있다가 다시 일어서있는데 나도 모르게 선 채로 꾸벅 졸았나 보다. 우리 교구 담당자께서 안쓰러웠는지 앉아있으라고 하셨고 행사가 밤 12시가 넘어가도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상태가 안 좋은 나와 다른 몇 명은 담당자의 인솔로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에도 5시에 눈을 뜬 데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졸려본 것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