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건축가 Jun 18. 2019

감각을짓다3

반응하고 꿈틀거리는 건축

주 : 오랫동안 다듬어 온 원고를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꿈틀거리는 건물


흔히 겪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건물이 꿈틀 거리기도 한다. 고정된 상태로 현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배경’, 또는, 몰랐던 현상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그때 그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순발력 있게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완성된 결과물도 아니고 의도된 효과도 아니기에 ‘움직이는 건물을 디자인했다!’라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단지 우연히 생긴 해프닝일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처음부터 움직임이나 변화, 적응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된 건물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다방면의 기술적 성취를 디딤판으로 삼아, 수 천년 동안 쌓인 견고한 편견에 도전하려는 건물들이다. 현상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교감하여 스스로 표정을 바꾸는 건물들이다.



파리의 세느 강변에 자리 잡은 ‘아랍문화원’(institut du monde arabe)을 이런 방면에서 선구적인 건물로 꼽을 수 있겠다. 1987년에 지어진, 유명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 : 1945~)의 초기 대표작이다. 아라베스크 패턴이 건물의 유리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패턴의 알맹이 하나하나에 조리개가 달려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조리개에 의해 유리 너머 실내로 들어오는 햇볕의 양이 조절되는 것이다. 커튼이나 블라인드 따위를 설치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하지만 아랍문화원의 조리개는 건물의 디자인을 이루는 당당한 요소로써 전면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커튼이나 블라인드와는 다르다. 많은 건축가들이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생략된 상태로 예상 투시도를 그린다. 건축가에게 커튼이나 블라인드는 ‘공식적인’ 디자인 요소가 아니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 필요에 의해 임의로 추가되는 부차적인 요소인 것이다. 현실 속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방식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완결된 모습을 목표로 디자인한다.’라는 건축가들의 작업 태도 또한 큰 이유일 것이다.


발표된 당시에는 기계적인 이미지만으로 충격적이었는데, 이미지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순발력 있게 반응한다는 개념은 에너지 소비를 경계하는 세태와, (센서와 구동장치, 그리고 프로그램에 이르는) 각종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이후 다른 많은 건축 작업에 영향을 끼쳤고, ‘반응형 건축(responsive architecture)’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아랍문화원’의 조리개 장치는 소박하게 보일 정도로, 훨씬 더 적극적으로 ‘꿈틀 거리’ 거나 ‘뻐끔거리’는 건축을 곧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낯설어 보이지만 어쩌면 이 것이 건축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건축은 일차적으로는 가혹한 자연으로부터 거주자의 몸을 보호한다. 그리고 날 것의 자연 속에서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행위와 활동을 안정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건축을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옷’이나 ‘확장된 몸’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옷’이나 ‘몸’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절이나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서 다른 옷을 입는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서 털의 밀도가 달라지거나 빛에 따라서 동공의 크기가 달라지는 등, 몸 또한 상황에 맞춰 달라지기도 한다. ‘옷’과 ‘몸’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데 오직 ‘건축’만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찌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진화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몸과 삶의 변화에 맞추어 순발력 있게 스스로 변화하는, 새로운 건축으로의 진화.


진화의 명분과 기대되는 가능성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겠지만, 이러한 흐름에서 비롯된 당장의 결과물들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여러 가지 상황들 중 유력한 것으로 ‘역설’이 있다. ‘뜨거운 얼음’이나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것들이 역설의 익숙한 예가 되겠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약간의 충격과 함께 당혹감을 느끼게 되고, 곧이어 의외의 상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역설의 묘미가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에 관련된 맥락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이는 것처럼’, 또는 ‘변하지 않는데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들 수 있겠다. 



도쿄의 ‘우에노’라는 오래된 동네에 자리 잡은 ‘도쿄 국립박물관’은 여러 건물들이 모인 학교 캠퍼스와 같은 구성을 하고 있다. 그 건물들 중 하나가 ‘요시오 다니구치’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호류지 보물관’이다. 우아하고 절제된 표현과 정교한 마무리로 특히 건축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넓고 얕은 연못과 반듯하게 펼쳐진 커다란 지붕이 자아내는 차분한 풍경이 인상적이다.


좋은 건물이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잡지 속의 사진을 보면서는 좀처럼 공감하기 힘들었다. 건물 앞에 펼쳐진 연못은 그저 그렇게 식상하게만 보였고 얇고 평평하게 올라간 커다란 지붕 또한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건물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모호한 공간감을 연출하려는 의도라 짐작하였는데, 그렇게 연출될 공간의 아름다움이 사진을 통해서는 실감 나지 않았다. 조금 느슨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직접 건물에 찾아가서 몸으로 겪어보니, 연못과 지붕을 이렇게 만들어서 배치한 의도, 즉, 건축가가 기대했음직한 연못과 지붕의 역할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바람과 함께 두툼하게 출렁거리는 연못의 물결. 

출렁거림에 맞물려 바람만큼이나 경쾌하게 번뜩거리는 햇볕. 

그 섬세한 일렁임이 넓게 펼쳐진 평평한 지붕의 표면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붕 표면에 새겨진 섬세한 요철 줄무늬는 투영되는 일렁임에 입체성을 더해주었다.


움직일 리 없는 지붕인데 마치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잡지 속 사진으로는 확인하기 힘들었던, 오직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효과였다. 


그렇다. 지붕은 연못 표면의 떨림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배경’, 또는, 몰랐던 현상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감(共感)에서 비롯된 감동


호류지 보물관의 지붕은 단순히 공간을 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붕이 품고 있었던 것은 추상적인 공간도 아니었고, 쓰임새로 설명되는 실용적인 공간도 아니었다. 바람과 물결을 타고 들어온 빛의 조각들이 잠자리 날개처럼 팔랑거리며 어른거리는 작은 우주였다. 지붕은 형식을 갖추기 위해 덧붙인 장식이 아니었다. 바람과 물결과 햇볕을 담아내는 ‘현상(現象, phenomena)의 집’이었다.


만약 지붕을 햇볕의 일렁거림에 반응하여 정말로 ‘꿈틀거리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지붕 표면에 바람이나 반사광을 포착하는 센서를 부착하고, 지붕 내부에 센서의 신호에 연동되어 작동하는 모터 따위를 설치한 뒤, 신축성이 있는 방수섬유 따위로 마감을 했더라면? 그래서 화창한 날에는 지붕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흐린 날에는 지붕이 잠잠하게 가라앉기라도 한다면? 또는 바람이 불어서 연못에서 반사된 햇볕이 벽에 어른거릴 때마다, 벽의 표면이 부들부들 떨리기라도 한다면?


분명 신기하게 느껴졌을 테지만 지금의 호류지 보물관에서 느껴지는 종류의 감동은 없었을 것 같다. 현상과의 교감을 통해 현장에서 온몸으로 발견하듯 느껴지는 감동 말이다. 꿈틀거리는 표면에서는 미묘한 빛의 어른거림이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이는 것 같은’, 또는 ‘변하지 않는데 변하는 것 같은’ 역설의 묘미를 느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기에서의 감동은 ‘공감(共感)’에서 비롯된 것 아니었을까? 나와 상대방이 같은 현상 아래 엮여 있음을 확인하며 느끼는 기쁨. 


몸으로는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똑 부러지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던 현상을 건축을 통해 새삼스럽게 깨닫고 공감한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공감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감동적이겠지만, 직설적으로 표출되는 메시지는 마치 강요받는 듯해서 피곤할 수도 있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오히려 거부감이 들어서 공감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의 공감이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감동적일 때가 있다. 하물며 아무런 의식이나 감정 없는, 그리고 한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않는 건축을 통해 현상의 변화를 깨닫고, 그래서 건물과 함께 현상을 공감하고 세상과 함께 소통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때의 감동은 얼마나 강렬하겠는가? 


건축으로 인해 홀연히 드러난 현상을 마주한다. 아무런 관계없이 그냥 멀뚱히 따로따로 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여러 존재들이, 현상의 투영과 발현을 매개로, 현상의 번짐에 힘입어, 깊은 인연으로 서로 엮여 있었음을 발견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몸이 현상 속으로 확장된 것 같은, 그래서 세상과 하나가 된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렁이고 소리가 퍼지고 햇볕이 부서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곳곳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고, 그런 현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낼 구조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겪을 수 있는 감동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런 역할을 하는 구조체가 ‘건축’이 아닐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왜 지금 나는 건축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니, 현상을 드러내어 공감을 이끌어내는 매개체의 역할을 건축이 떠맡을 기회가 많기 때문이겠다. 게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즈음의 건축은 커지고, 높아지고, 촘촘해지고, 반들반들해졌기 때문에, 현상을 드러내고 확장할 기회가 더더욱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물질적인 실체, 즉 형이하(形而下)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건축에 비물질적인 가치, 즉 형이상(形而上)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바람의 연장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건축가들은 건축을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고 싶어 해 왔다. 그래서 물질보다 더 우월할 것 같은 정신적인 가치나 의미를 건축에 덧씌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벽이든 지붕이든, 분명히 물질로 존재하는 건축의 어느 부분에 물질이 아닌 것 같은 현상이 깃들어 감각에 혼란을 주는 상황이, 마치 건축에 채워진 물질적인 구속을 벗겨내어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내는 듯한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네번째 조각으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감각을짓다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