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미준의 작품들. 걸러지고 집중되는 감각.
주 : 오랫동안 다듬어 온 원고를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속 또 다른 나라’다. 햇볕도 바람도 바람 속 습기도, 그리고 땅의 생김새도, ‘육지’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낯선 풍광에 걸맞게 제주도에는 이색적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유명한 국내외 건축가들의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섬 전체가 마치 ‘건축 박물관’ 같다. 그중에서도 ‘이타미 준’(伊丹潤, 1937년~2011년)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가 남긴 ‘비오토피아 미술관 연작’은 손에 꼽을 정도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오토피아는 고급스럽게 조성된 장기 숙박시설인데, 넓게 조성된 생태 공원 안에 작은 미술관들이 마치 조각작품처럼 놓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상상하는 거창한 미술관이 아니다. 한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집들이다. 물(水) 미술관, 바람(風) 미술관, 돌(石) 미술관, 그리고 지중(地中) 미술관. 이 중 물, 바람, 돌, 세 개의 미술관들은 작품을 진열하기 위한 건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작품인 미술관이다. 번듯한 건물이라고 말하기 애매해서 작은 구조체나 (넓은 의미의) 정자(pavilion)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중에서 ‘물(水) 미술관’과 ‘바람(風) 미술관’을 살펴보자.
야트막한 잔디언덕, 땅에 반쯤 묻힌 콘크리트 상자가 보인다. 물(水) 미술관이다.
두툼한 벽이 어떤 상자를 둘러싸고 있다. 벽과 상자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안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 같은 길이 나온다. 이끌리는 대로 걸어가다가 길의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완강하게 사방을 가로막는 커다란 콘크리트의 틀! 그리고 그 틀의 한가운데에서, 아래로는 네모 반듯하게 펼쳐진 수반(水盤)과, 위로는 둥글게 뚫려 있는 하늘이다. 감각은 자연스럽게 몸 앞에 펼쳐진 물과 하늘에 집중된다. 하늘은 주변의 풍경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깨끗하게 오려진 얇은 종이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 없이 접하며 익숙하게 보아왔던 그 하늘이 아니다. 깊이나 맥락을 가늠할 수 없게 된 하늘이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빛을 띠고 있고 어떤 공기를 머금고 있고 어떤 바람이 불고 있는지. 즉, 어떤 현상이 펼쳐지고 있는 하늘인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머리 위 하늘에서 펼쳐지는 현상은 자연스럽게 발 밑의 수반으로 이어진다. 하늘 언저리를 두서없이 맴돌던 감각의 더듬이가 마침내 서성거림을 멈추는 곳이다. 물에 비친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은 현상의 통로였고 물은 그 현상을 드러내는 화면(screen)이었음을 알겠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하늘과 물은 서로 닮아서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그래서 물(水) 미술관이다. 가두어진 공간 속에 하늘과 물을 담은 미술관. 물의 재현이나 묘사가 아닌, 그렇다고 물에 대한 설명도 아닌, 물이 자아내는 현상을, 물로 인해 펼쳐지는 세상을 담은 미술관.
풀숲 사이로 또 다른 작은 나무집이 보인다. 바람(風) 미술관이다.
나무 널판들이 가지런하게, 그리고 약간 성글게 붙어있는, 작은 상자 모양의 집이다. 집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악기 같은 인상이다. 벽이 찢어지면서 생긴 틈이 보인다. 들어오라 손짓하는 것 같다. 틈을 통과하니 옆으로 길게 뻗은 방이 나온다. 밖에서 짐작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크기와 형상의 공간이다. 그런데 공간의 표정이 뜻 밖이다. 사방으로 늘어선 나무 널판들이 살짝 간격을 두고 성글게 붙어있는데, 널판들 사이로 잘게 조각난 햇볕과 바람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꽉 막힌 벽이 아닌 다공질의 거름막(필터/filter)이다.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바깥에 펼쳐진 풍경은 걸러내고, 잘게 쪼개진 빛과 공기,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소리만 통과시키고 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눈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앞서 공사장 가림막을 두고 이야기했듯) 바람에 흔들리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곧잘 바람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바람의 실체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눈 앞 가득 펼쳐지는 풍경에 압도되어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해지는 것이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 바람이 내 몸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촉감을 빼고 바람을 충분히 이해했다 말을 하면 안 된다. 바람(風) 미술관은 바람의 풍경은 숨기고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바람이 어루만지는 촉감만을 몸에 새긴다. 그렇게 몸에 새겨진 각인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바람이 지닌 다양한 표정들을 이렇게 생생하게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
그래서 바람(風) 미술관이다. 가두어진 공간 속에 바람을 담은 미술관. 바람의 이미지가 아닌 바람이 자아내는 현상을, 바람으로 인해 확장되는 감각을 담은 미술관.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다. 독서할 때 음악을 꺼 놓는다. 음악에 몰입하기 위해서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린다. 어떤 감각을 최대한 열어 두고 싶다면, 방해가 될 만한 다른 감각을 닫아 놓는 편이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따로 알려주거나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상황이 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이타미 준’의 비오토피아 미술관 연작은 다른 잡다한 현상들을 걸러내고 오직 한 두 가지 감각에만 집중하게 하는, 거름막(필터/filter) 같은 건축의 좋은 예다. 오로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의도하는 현상만을 체험케 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이다. 명상으로 이끌어주는 건축이다. 현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배경’, 또는, 몰랐던 현상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라는 건축의 의미가 극단적으로 구현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구체적인 연출 의도가 담겼다는 점에서, ‘배경’ 이라기보다는 ‘장치’라 부르는 편이 낫겠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건물과는 사뭇 다른 형식의 건물이다. 건축의 속성 중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특정 내용만을 극단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여러 기능이나 책임들을 균형 있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깥이 더울 때 안도 덥고, 바깥이 추울 때 안도 추운 건물이다. 수도관도 하수관도 연결되어 있지 않는 건물이다. 눈과 비를 제대로 막아 주지도 않는다. 여기에 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당연히 있어야 할 기능들이 제거된 불합리한 상황이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가지의 기능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벨리스크’와 비슷한 건축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건축이 갖추어야 할 여러 속성들 중 중력에 대한 도전만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느라, 건축과 조각의 경계에 위태롭게 자리 잡게 된 오벨리스크.
‘이타미 준’의 비오토피아 미술관 연작은 분명 섬세하게 만들어진 완성도 높은 건축이지만, 대강의 의도와 구체적인 방법론의 측면에서 아주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예를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적당히 격리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단편적인 현상을 의도적으로 연출, 감각을 예민하게 이끌어내어 명상과 성찰로 이끌어내는 수법.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년~)의 작품(특히 스미요시 주택, 빛의 교회, 바람의 교회 같은 초기작들)들을 비슷한 사례로 들 수 있겠다. 심지어 물(水) 미술관은 나오시마의 ‘베세네하우스’와 공간 구조가 찍어낸 듯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의 건축은 ‘바깥과 구분된 영역을 만들고 그 안에 또 다른 자연을 집어넣으면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을 일본의 전통적인 다실(茶室)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물을 끓이고 잔에 따르고 거품을 내고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를 이루는 일련의 행위. 그 미세한 몸짓과 섬세한 소리 하나하나에 각별하게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바깥의 감각으로부터 단절된, 좁고 어두운 다실(茶室)이라는 공간.
고딕 성당에서도 비슷한 의도를 발견한다. 대체로 시각을 제한하면서 청각과 공간감을 예민하게 하려는 연출의도가 느껴진다. 플라잉 버트리스 (flying buttress) 덕분에 돌로 만든 구조체 치고는 창문이 높고 넓은 점이 고딕 성당의 강점이다. 그런데 높고 넓게 뚫린 창문들은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색색의 그림으로 빼곡하게 물들여진(stained) 창문이라, 바깥 풍경이 보일 일이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볕의 흐름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연출되는 압도적인 영상효과 때문에 그다지 민감하게 감지되지 않는다. 소통하고 연결하는 창문이라기보다는 콘텐츠를 표출하는 거대한 미디어 패널에 가깝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일방적으로 표출되는 엄청난 볼거리 덕분에 일상적 감각기관으로서의 시각은 사실상 마비된다. 그 공백을 청각이 밀고 들어온다. 고딕 성당은 거대한 악기라 볼 수 있다. 공간 전체가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통이다. 고딕 성당 특유의 공간 윤곽은 비일상적인 음향효과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고딕성당 특유의 음향은 거꾸로 고딕성당 특유의 공간감을 암시한다. 이때 스테인드 글라스의 영상은 청각과 공간감을 사무치게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이 된다.
여러 시대와 다양한 배경에 걸쳐 비슷한 사례가 꾸준히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며, ‘잡다한 현상들을 걸러내고 오직 한 두 가지 감각에만 집중하게 하는 거름막(필터/filter) 같은 건축’이라는 이미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건축의 개념에 닿아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바닥이든 기둥이든 벽이든 지붕이든, 건축은 무엇인가를 세우고 올려서 바깥과 구분되는 영역을 만드는 데에서 시작된다. 바깥으로부터 구분된 영역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와는 어떻게든 달라진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이런 현상은 바깥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흥으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은 ‘물(水) 미술관’이나 ‘바람(風) 미술관’ 같은 극단적으로 연출된 일부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 모든 건축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었던 것이다. 건축이 건축이기 위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라 말해도 좋겠다. 좀 더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 모든 건축은 바깥과 다른 환경을 제공한다. 바깥보다 시원하거나 따듯하거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좁거나 넓거나. 어지럽거나 가지런하거나. 그래서 건축이고, 그래야 건축이다.
다양한 맥락에서의 선입견들이나 확장된 의미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건축’이라는 개념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는 구분되는 영역을 만드는 일’이라는, 좁고 분명한 의미로 환원된다. 그렇게 구분된 영역 안에서 현상은 연출, 또는 편집되어, 의도되었던 상황이 벌어진다.
이렇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결국, ‘건축 공간을 통해 얻는 감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오히려 낯설어 보이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음 조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