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는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라 불린다. 서구에서는 예로부터 관료제를 비효율적인 체제로 바라보았다. 동아시아에서 관료제는 경제발전의 주체가 되어, 엘리트 관료들을 중심으로 국가는 빠르게 발전하였다. 현재 관료제는 동력을 잃어서 하나의 형식주의로 자리 잡아,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과거에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관료들은 국가 권력에 봉사하며 계획 경제를 실현하여,소련식 계획경제를 모방하여 중공업으로의 산업 개편을 이루어냈고 많은 빈곤이 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 노동자들의 소외, 빈부격차 등이 발생하였다. 그래도 정권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는데 절대적 빈곤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과격한 방식이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료들은 경제적인 객관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며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현재잼버리 사태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보면 과연 국가의 개입이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적인 객관성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관료들은 환상을 쫓고 있다. 국가 발전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국가 발전은 하나의 경제적 가치로 전환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주체(국민)는 소외된다. 관료들은 국민으로부터 부를 걷어가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부의 분배에 대한 근거는 합의되지 않고 있다.
국가란 어떻게 보면 실체가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 민족국가의 개념은 근대가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했고 20세기 때 확립되었다. 어떤 관점에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정부 관료제와 사적 영역만으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정부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적인 근거나 사회적인 합의 없이 자기 주관대로 사적 영역에 개입한다. 많은 사람들의 재산권은 침해되고 자유는 통제된다. 이들이 이런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왜 어떤 기업의 생존이 관료제의 결정에 의해 좌우되는가? 영세업체는 국가와의 계약을 통해 순식간에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왜 더 많은 부를 가져야 하는가? 공평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준이 없다. 파이를 늘리는 행위는 절대적인 측량에서 용인이 되지만 부의 재분배에 관해서는 누군가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합의가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합의 행위는 의회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의회는 그런 역할을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관료제를 견제하기보다는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기획재정부의 눈치를 보며 이권다툼을 하고 있다.
국가와 정부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창조와 자유는 권력과 관습에 대한 도전이다. 국민은관료가 결정하는 세계에 저항해야 하며 관료와 국가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관료가 국민들을 울고 웃게 한다. 삶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부당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