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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윤 Aug 18. 2024

한 여름밤의 권태


한 여름의 끈적한 무더위처럼 나를 옭아매는 공허와 권태는 당최 떨어지질 않는다. 이 시간엔 핸드폰을 켜서 숏츠를 보며 시간을 보내려 해도 별 재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산책을 나간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니 몸이라도 쓰는 것이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다 보면 그래도 시간이 잘 간다. 어린 날의 열정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20대는 스치기만 해도 불꽃이 튄다던데 내게 남은 것은 다 타버리고 남은 재뿐이다. 과거의 망령만이 남아 내 안을 떠돌고 있다. 나만 홀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한 조각. 그것을 보면서 쓸쓸한 웃음을 짓는다.


다들 머리가 커버렸는지 내가 알고 있던 깜찍한(?) 얼굴들은 징그러운 형태가 되었다. 풋내가 나는 순수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삶을 알아가기 시작해서 다시 만난 동창들을 보면 속 안에서 거북함이 올라온다. 난 왜 자라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가. 나이는 먹어가는데 거울에 비치는 내 안의 동심에서 건장한 남자가 여장을 한 모습처럼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아직도 지나간 것들을 모두 용서하지 못했다. 과거의 상처는 새로운 경험으로 덮어버려야 하는 덮을 만한 새로움은 없고 지나간 것에 대한 쓸쓸함만이 자리 잡고 있고 있다. 아마 이것은 신이 내게 주신 형벌에 가까우리라. 내 피는 흑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권태는 시작되었다. 예민한 기관이 가져오는 강한 감정 뒤에는 회색빛만이 남는다. 잔인한 현실의 빛깔이 내 눈을 멀게 했다.


알고 있다. 태양의 붉은빛은 저 멀리 어둠 속을 뚫고 나가 세상을 비쳐준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새벽의 어둠이 좋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 또한 덮어버린다. 암흑 속에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나는 새벽에 반짝이는 별을 찾아 헤매고 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뚫고 나오는 별빛을 보게 된다면 지나간 것들을 용서할 수 있겠지. 언젠가 대낮에 정열의 태양을 마주 서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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