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의 일기 No.4]
지난 주말에는 엄마 아빠를 만나러 갔다 왔다.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가려고 노력하는데 나에게는 자주 하는 일로 생각되지만 두 분은 내가 명절을 제외하고는 별로 드나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금요일 저녁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오전에 이것저것 정리하고 분주하게 출발하는 거지만 토요일 늦은 오후에 도착하여 만 스물네 시간만에 떠나는 나의 일정은 두 분에게는 영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그곳에 간다고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같이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우리 대신 두 분의 곁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와 조금 놀고 두 분의 일을 눈곱만큼 돕는 게 전부다. 엄마 아빠에게도 다소 부족하고 나도 크고 작은 일들을 포기하면서 때로는 의무감에 가는 거지만 그래도 매번 더 자주 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갈 때마다 두 분의 나이 듦이 눈에 띄기 때문일 거다.
부모님은 그 세대에 비해서도 일찍 결혼을 했고 일찍 부모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두 분의 맏이이다 보니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로부터 부모님이 왜 이렇게 젋냐는 말을 자주 들었고 지금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동료들로부터 '아직 많이 젊으시네'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인지 두 분의 체감 나이는 꽤 젊은 시절에서 멈춰져 있다. 그래서 도착해서 두 분을 마주하는 순간 두 분의 주름과 흰머리와 달라진 체형에 마음속으로 놀랄 때도 많다. 갈 때마다 많이 달라져서라기보다는 두 분의 외모에 대한 나의 기억이 5,6년 전 멀게는 10년 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부모님보다는 연세가 적기는 해도 두 분도 늙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금씩 두 분 집에 가서 내가 해결하고 와야 하는 일들이 더 늘게 될 것이다.
두 분도 '이제 나도/우리도 늙어서'로 시작하는 말을 자주 하고 건강에 대한 여러 염려들을 하신다. 그런 대화 하나하나에 예민해지지는 않지만 많은 자식들이 그렇듯, 두 분의 시간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쉽고 그리고 지나간 힘든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아직 받지도 못한 채 체력이 떨어져 가는 모습에 좀 슬퍼진다.
일요일 오후, 짧은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빠가 잠시 나간 사이 - 그걸 기다린 건 아닌 것 같지만-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던 엄마가 문득 질문을 했다.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진지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더 가볍게 대꾸했다.
"뭐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 거야?"
엄마는 그래도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단지 설명하고 싶었던 건지 질문의 의도를 말하기 시작했다. 질문의 의도는 엄마의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내용의 대화를 누군가와 한 적도 있었고 두 분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근처에 모셔와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질문은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의 입장에서 둘 중에 한 분만 남았을 때 덜 부담스러운 쪽을 묻는, 현실적인 입장에서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현실적인 질문이라서 더욱 대답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 하고 평균 연령이 몇 살이라고 말해도, 두 분이 그 나이가 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내 눈에 부모님이 노화하는 것이 보이니 두 분의 노환과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과 대화는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만약의 경우에 연명 치료는 하지 마라', '우리가 죽으면 화장해라', '수목장도 괜찮을까?' 같은 말과는 결이 달랐다.
존엄사를 선택하겠다거나 장례 방식이나 집 또는 밭을 처분하는 일에 대한 얘기는 나에게는 아직 판타지 장르에 가까운 주제다. 그냥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의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판타지 장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두 분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 공문서 위의 기록을 읊듯 냉정하고 건조하게 말하는 일이 되는 것 같았다. 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을 말하는 건 나머지 한 분은 덜 오래 살아도 괜찮다고, 더 일찍 떠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두 분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더 개인적으로는, 대답을 하면 엄마와 아빠 각각에게 느끼는 나의 감정의 거리감과 속내를 드러내고 현실적인 질문인 만큼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질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도 그렇게 강요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간 것 같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아주 팽팽한 내적인 긴장을 느꼈다.
몇 년이 지난다고 해도 엄마에게 또는 아빠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는 두 분 누구의 입으로도 이 질문을 듣고 싶지 않다. 이 질문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들을수록 두 분이 떠나는 미래의 사건이 두 분 중 한 분만 내 곁에 남아 있을 미래의 어느 날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아직은 또 앞으로 얼마간은 나는 그 미래를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느낄 정도로 어른이 되지는 못 할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