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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icial Kes Apr 05. 2022

넌 전공에서 도망칠 수 없다

물론 사바사

 난 영어를 전공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영어학을 전공했다. 원래는 학부인데 통역은 정말 자신이 없었고 영어학개론 1, 2 수업에서 운 좋게 좋은 성적을 거둔 기억을 발판으로 영어학을 선택했다. 사실 마음속으로 사회에 나가면 통역 전공 쪽이 도움 될 것 같았지만 나는 영어 말하기에 큰 트라우마가 있어서 항상 도망쳐왔고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처음부터 영어를 피해왔던 것은 아니다. 난 언어 배우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스스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왔었다. 그래서 수능도 잘 보았다. 역시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는 첫 번째 사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문제는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야생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수업을 들어갔는데 이미 원어민 교수와 티키타가를 하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읽기만 하는 한국식 교육을 배우는 나는 당연하게도 원어민 교수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수업 내용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아니 수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부를 위해 원어민 수업을 몇 번 도전했으나 내게 돌아오는 건 C, D라는 알파벳들이 찍힌 성적표였다. 급기야 너무 기가 죽어 누군가 앞에서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도 창피했다. 흔히 한국인들이 갖는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 아예 말을 안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방점을 찍어준 것은 한 러시아 여자 애였다.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그 기억은 강렬했다. 말하기 시간이었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해 정말 정말 난감했다. 그 친구는 급기야 나랑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난 굉장히 민망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물론 이상적인 시나리오처럼 말하기를 엄청 연습해 다음 학기에 두려움을 딛고 일어섰다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았겠으나 나는 결국 영어에서 도망치는 영어 전공생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의 마케팅으로 도피가 시작됐다. 


 그렇게 도피 생활을 하던 중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영어는 내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로 생각되었다. 어쩌다 보니 글로벌 시장 타깃인 VR 게임사에 들어오게 되어 영어 이메일을 지금까지 수백 통째 쓰고 있다. 처음에 중국에서 유통 오퍼 온 것을 처리하라고 들었을 때 속으로 물음표를 수십수백 개를 띄웠다. 다시 영어를 쓰려니 너무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나에게 감사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스스로 생성해서 해야 하기에 고민이 많았는데 그 중심을 잡아준 것이 영어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최근 메타버스 산업에 열을 올리고 있고 한국까지 콘텐츠를 찾고 있었고 그 외에도 게임 관리를 위해서 Meta support 팀 하고도 계속 소통해야 했다. 말하기를 피하니 이제는 쓰기가 나를 괴롭히게 되었다. 게다가 Formal 한 비즈니스 이메일을 쓰려니 정말 처음에는 곤욕이었다. 이상하게 쓴 거면 어쩌나 무례하게 보이면 어쩌나 메일 한 통에 땀을 뻘뻘 흘리며 썼다. 이제 생업이 되니까 대학교처럼 피할 수 없었고 Youtube며 책이며 닥치는 대로 보면서 배웠다. 지금은 겨우 형식 정도 익혀서 쓰게 되었지만 뒤돌아보면 이상하게 써서 난감한 순간들도 많았다. 어색한 표현들이 많아서 상대방이 이해 못 한 경우도 있었고 공손한 정도를 뒤바꾸며 공손하게 썼다가 살짝 캐주얼하게 썼다 하니 좀 혼자 민망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영어와 불편한 동거는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태도가 좀 바뀌어 열심히 부딪힌 자고 마음먹었다. 좀 틀리면 어때 좀 어색하면 어때 좀 바보같이 보이면 어때 하고 철판을 깔며 다시 보내면 되지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근데 쓰기는 이제 그렇다 치고 옛날 아일랜드, 영국 다녀오면서 듣기, 말하기도 안되었는데 또 이렇게 처맞으면서 배우기보다는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지킬지는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눈앞에 닥쳐야 하는 동물인 것 같다. 


P.S. 몇 주간 VR 게임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쓰려했는데 내 업무인 마케팅 부분에 오니 할 말만 많고 정리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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