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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icial Kes Nov 16. 2020

사람도 연어처럼

돌아갈 곳이 있다면 좋겠다

    정말 힘들 때면 나도 모르게 태평동을 찾아간다. 내가 살던 아파트가 철거되고 이미 새 건물이 들어섰는데도 말이다. 태평동은 명절에 시골의 의미같이 내게는 고향이다. 고향의 의미를 먼저 따지자면 우리 아버지 세대는 태어난 곳이겠지만 그다음인 90년대 생들에게는 고향의 의미가 조금 복잡해진다. 90년대는 밀레니엄 세대로 분류되는데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과 디지털 세대의 시작을 경험한 세대이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 변화가 많았기에 밀레니엄 세대 그리고 기성세대도 적응하느라 많은 적잖게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고향을 떠나 정착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단번에 정착하는 삶을 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천이지만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성남 태평동이다. 물론 이사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부천 내에서도 많이 다녔다. 그리고 이제는 분당 쪽으로 이사를 와서 태평동에 살았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초중고등학교도 여기서 나왔지만 나는 고향을 태평동으로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이 많다 보니 이제 본적의 의미가 희미해져 따지지 않는다.


태평역 역사 2번 출구로 나가면 아주 멀리 예전 우리 집이 있었다


    내가 고향의 원초적 의미인 태어난 곳이 아닌 태평동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다. 부천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다. 내 기억은 유치원을 다닌 기억부터 시작한다. 아주 꼬마였을 때 웅변 유치원을 다녀 단상 위해서 발표를 했던 기억부터 마지막 겨울 학예회를 마치고 초등학교를 입학한 기억까지. 생생한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다. 두 번째로는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로 마음이 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태평동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정말 구식인 동네이다. 지금은 2020년이지만 아직도 90년대 한국 사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에서야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왔지 1~2년 전만 해도 프랜차이즈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을 보면 슬럼가를 연상케 한다. 이런 데도 마음 편했던 이 곳이 아직 그립다.        


    반면에 분당으로 이사 오고 나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 환경적으로 정말 좋아졌음에도 한순간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붉은 벽돌집 밖에 없던 수정구와 달리 주변에 공원이 있고 나무들이 즐비해있었고 이전과 달리 널찍한 집과 수많은 가게들 교통도 엄청 편리하고 정말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다들 이 곳이 좋다고 생각해서 일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급속도로 모였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졌다.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경쟁과 좁힐 수 없는 경제적 격차를 배워버렸다. 이전 동네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게 살고 비슷하게 행동해서 느끼지 못했었다. 이사 온 동네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전학 오는 친구들도 많았고 애초에 계획 신도시다 보니 분당 출신 친구들도 적었다. 모두가 이방인이라 경계하고 제 몫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내가 느낀 경쟁의 묘사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사실 좀 숨 막힌다.


    경쟁 다음으로 느낀 것은 정말 좁힐 수 없는 빈부격차였다. 어린 나이에 무슨 빈부격차를 느끼겠냐고 하겠다만. 단적으로 생일 파티를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구는 커디란 2층 집인데 1층은 통유리에 2층은 거의 1층과 맞먹는 집이 하나 더 있어서 반 친구들이 전부와도 널찍했고 누구는 5명만 와도 꽉 차는 작은 주택에 살고 있었다. 나는 후자에 쪽에 가까웠다. 어린 나이에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 산다는 게 자존심 상했고 스스로 한탄했던 적도 많았었다. 빨리 격차를 배운 만큼 단념도 빠르고 점점 관심에서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친구들이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보면 부럽고 몇 번 어머니에게 옷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용돈이다. 지금은 어린 친구들이 용돈을 받는 것이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용돈을 받아 본적이 거의 없다. 준비물 살 때만 받아서 남은 돈은 부모님을 돌려드렸다. 정말 충격인 것은 친구들과 하교를 하면 친구들이 매일 같이 분식을 사 먹고 매일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슈퍼에 들려서 분식집에 들렀다. 나는 돈이 없어서 몇 번 친구들에게 얻어먹긴 했지만 부담스러워 먼저 집에 가곤 했다.

    

    이런 환경에서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하루하루 조급하고 항상 초조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갑자기 뒤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웠고 친구 하나 사귀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매번 누군가의 뒤를 쫓아 달리기 바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 하지만 억지로 떠밀려 온 사람처럼 하기 싫은 일들을 처리해나갔다. 이런 마음은 비단 나의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엄마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느끼는 초조함만큼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마치 공부를 못하면 인생 끝나는 것처럼 말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학원 정보를 얻고자 여기저기 어머니들과 모임을 가졌지만 전혀 맞지 않는 대화 주제에 지쳤었다고 털어놓으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도 믿었는지 나는 학원 뺑뺑이에 시달렸고 여유도 없이 생존을 위해서 살고 있었다. 마음 둘 곳은 집 안에도 집 밖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병들어 갔다.


내가 살던 집은 재건축이 들어갔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대학이나 직장에서 분당에 산다고 하면 정말 좋은 동네 산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난개발이 된 곳을 보면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 말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항상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통상 분당 사는 사람들은 분당 산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 구태여 성남에 산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성남 안에서 이렇게 차이 날 수 있는지. 경원대(현 가천대)의 정말 수직 경사의 도로며 작은 구멍가게들, 90년대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간판들, 누가 갈까 싶은 낡은 노래방, 이제는 볼 수 없는 예전 중앙 시장에 가면 아직도 예전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그곳을 찾아간다. 조금이나마 그 공간에서 만큼은 마음 편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의 삶을 잊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경쟁 사회고 그 경쟁에 대한 보상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채용 시장, 경제 상황, 코로나까지 몸과 마음이 한 시라도 편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 집 한 곳 마련하기가 쉽지 않고 사람들은 월급으로는 살기 어렵다는 생각에 주식, 펀드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모두가 도피처 한 곳은 만들어놔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무진기행이 발표된 1964년 그리고 2020년, 놀랍게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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