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중독된 초딩 아들의 고백
요즘 책들을 사 모으고 있다. 대부분 내가 읽을 책이다. 집에 책이 쌓이는 게 싫어 한동안 도서관이나 전자책을 이용하는 편이었지만, 연체의 부담을 늘 짊어지고 사는 것도 피곤하고 여러 가지 책을 마음 닿는 대로 동시에 읽고 싶어 꼭 구비하고 싶은 책들을 다시 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읽을 책이 집에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읽던 책을 제주 레이지마마에 싹 다 기증한 후, 아이 책은 늘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한번 읽은 책은 다시는 안 보고, 좋아하는 책도 대부분 학습 만화라 휘리릭 읽은 책들이 집에 쌓이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미리 빌려둔 책이 없으면 아이가 뒹굴뒹굴 거리다가 정 할일이 없을 때 집어 들 수 있는 책이 단 한 권도 없고, 결국 다시 유튜브의 세계로 빠질 수밖에 없는 천혜의 환경이 된 것이다.
최근 광화문 교보문고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내가 읽을 책 세 권과 큰 아들, 조카, 남편 선물 한 권씩을 사 들고 집에 오면서도 나는 둘째 서율이 책을 건너뛰었다. '어차피 안 읽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차피 안 읽을 거라도 자기만 빼놓고 책 선물을 돌리는 광경이 아이에게는 은근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잘 내색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마음에 은근히 담아두고 있는 것이 참 많다.) 나도 그게 자꾸 맘에 걸려, 지난주에는 서율이를 데리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교보문고는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이야."
"우와~"
아이는 영혼 없는 감탄을 하며, 와이파이 비번이 적힌 곳은 없나 살피고 있다.
"오늘 엄마가 너에게 10만 원어치 책을 사주려고 해. 마음껏 골라봐."
"진짜요?"
평소 책 선물을 달가워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의외로 엄청 기뻐했다. 생일 선물로 책을 받는 건 짜증 나지만, 아무 날도 아닐 때에 10만 원어치 책을 선물받는 것은 (그것도 마음껏 골라서) 신나나 보다.
엄마가 고른 책 한 권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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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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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세상의 모든 원소기호 118'
일 거라 생각하신 분들의 예상을 깨고,
정답은?
'그릿' 이었습니다.
만화책만 열 권쯤 고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나름 균형감 있게 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너를 너무 띄엄띄엄 봤구나. 미안해. 서율아.)
가장 먼저 집어 든 '책은 친구 잘 사귀는 법'
두 번째 고른 책은, 친구들과 수다 밑천으로 쓰기 좋은 '우리들의 MBTI'
세 번째로 학교 아침 독서 시간에 읽기 좋겠다며 '이토록 재미없는 13살'을 골랐다.
그리고 난 뒤 만화 코너로 달려가,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버나 웹툰 작가가 낸 책이 있나를 꼼꼼히 살핀 뒤 별다른 책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래도 만화책을 안 사면 섭섭하지!라는 듯, '마음의 소리' 1,2권과 '웃소' 1권을 집어 들었다. '마음의 소리'는 10년 넘게 연재해 온 웹툰인 만큼, 책으로도 장장 스무 권이 넘는 시리즈가 있어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두 권 정도만 읽고 다음 편 구매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아들의 현명함에 새삼 감사했다. '웃소' 또한 1, 2권이 있었지만 1권만 골라들었다. (너도 다 생각이 있구나.)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원소 118'를 고른 이유는, 우리 아이가 은근히 과학자적인 탐구 정신과 호기심이 왕성하기 때문
이 아니라 끝말잇기에 써먹기 위해서다.
그렇다. 서율이는 끝말잇기에 진심이고, 평화주의자인 그가 강한 승부욕과 근성을 보이는 유일한 분야다.
오직 끝말잇기를 위해 원소기호 책을 산다는 것이, 오직 슘, 륨, 뮴 등으로 끝나는 단어 몇개를 더 확보하기 위해 거금 2만 원을 투자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했다.
그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일까? 나도 밤에 읽어줄 생각으로, 어린이를 위한 자기 계발서 한 권을 슬쩍 끼워 넣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릿'
'금방 싫증 내고 지루해하는 아이에게 꾸준한 노력의 힘 '그릿'을 알려주는 최고의 책!'이라는 띠지의 문장을 보니 딱 서율이를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노력하는 거란다.)
하지만, 너무 대 놓고 교훈적이면 아이가 책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될 수 있으니 내용이 지루하면 안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 장을 열어보니, 오! 아이돌 연습생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흥미를 가지고 읽겠는걸?(그렇다. 서율이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전국 2백만 명의 아이들 중 하나다. )
어젯밤 아이와 함께 그릿을 읽었다. 나는 책을 읽어줄 때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그리고 연기 연습도 할 겸) 대사 부분은 서율이에게 읽게 한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아이와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편이다.
“서율이는 어떤 연예인이 되고 싶어?”
“음…다른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 좋아요.”
“그럼 개그맨?"
"딱 개그맨이라기 보다... 예능인?"
"아... 예능인도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롤 모델을 꼽는다면?"
"그런 거 없는데, 내가 누굴 꼭 따라 해야 해요?"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어떤 종류의 예능인이 되고 싶은지 궁금해서. 굳이 예를 들자면?"
(당연히 유재석이지 않을까 하는 나는 예상을 깨고, 서율이는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수근이나 이광수?"
"ㅎㅎㅎㅎㅎ 왜?"
"저는 주인공은 싫고, 약간 MSG 같은 역할이 좋은 거 같아요. 부담도 없고. 비중 있는 조연 같은 거?"
아, 이 아이는 정말 신중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구나.
어린이를 위한 그릿에는 챕터별로 <생각 키우기>라는 활동 페이지가 있다. 맨날 깨끗하게 읽고 반납할 책만 보다가, 볼펜으로 써도 된다고 하니 신이 났다.
질문 중에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가 있었는데, 서율이가 평소 상상하고 있던 자신의 미래의 모습도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유명인이 돼서 TV에 나와요. 근데,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TV를 볼 때마다, 제가 엄청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라요."
아, 이 아이는 정말 구체적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을 묻는 질문에 서율이는
계획짜기
사회공부
그리고
책 읽기를 꼽았다.
그러더니, ‘사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갑자기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너도 책 읽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엄마에게 맨날 유튜브만 보는 아들로 보이기 싫었구나.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됐구나.’
속마음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니, 그간 도와주지 않은 게 너무 미안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좀 도와줄껄. 도서관에 자주데려가고, 서점에도 데려오고, 읽을 만한 책 좀 진작 사줄걸.
서율이 말로는 자기가 곧 사춘기가 시작될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수다를 떨 수 있는 날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잘하면 되니까, 반성은 하지 말자. 어쩌면 방치의 시간이 있었기에 엄마랑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 책 읽어주는 엄마, 리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