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희 Sep 28. 2022

전체 공개형 인간

‘관종’적 글쓰기

글을 잘 쓰는데 공개하지 않는 친구가 있다. SNS에도 간간히 여행지 풍경이나 책 커버 사진을 올릴 뿐, 자신을 드러내는 글은 올리지 않는다.


우연히 이 친구가 오래전부터 블로그에 비공개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내 노트북을 잠깐 빌려줬는데, 네이버에 접속했다가 로그아웃하는 걸 깜빡했나 보다. 몰래 읽을 의도는 없었다. 잠자기 모드의 노트북 화면을 켰는데 로그아웃 되지 않은 친구의 블로그가 떴고, 이건 뭐지? 하고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계속 읽게 된 것일 뿐.  


다행히 유부남과 섹스를 했다거나, '나는 사실 리즈가 재수 없다.'는 등의 치명적인 내용은 없었다. 길에서 마주친 할머니와의 대화, 최근 본 영화에 대한 감상평, 삼각김밥이냐 동그란 김밥이냐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내적 갈등 등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담백하게 묘사한 글들이었다.


그래서 쉽게 고백할 수 있었다. "나 사실 네 블로그 글들을 읽어버렸어. 미안해. 말로 하면 첫마디부터 악 소리를 지를까 봐 문자로 말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로그아웃을 안 한 건 네 잘 못이고, 나는 어쩌다 들어가 글을 보게 된 거고, 비공개 글이라는 것도 읽은 지 한 참 지난 후에 알았어. 물론, 그걸 안 다음에도 계속 읽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관음증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네 글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야. 그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공개해. 네 글 정말 좋아."


다행히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멋쩍어하며 자기 글을 칭찬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비공개로 쓰는 이유가 뭔데?"

"음... 그냥.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게 부담스러워."

"스토킹 당할까 봐?"

"하하. 그건 아니고. 아마도... 다른 사람이 나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음. 그렇구나. 남들에게 평가받는 것이 불편하구나. 하지만 재능이 너무 아까운데. 그대의 담백한 일상과 독특한 관점을 나누어 주면 거기에서 삶의 영감을 얻는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그녀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불편하면 불편한 거니까. 이웃의 감동을 위해 너의 불편을 감수해라 마라 할 권리는 나에게 없으니까.


그녀와 달리, 나는 전체 공개형 인간이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나의 일상과 상황, 울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는 속마음까지 낱낱이 쓰고, 생판 모르는 남들에게 모조리 공개한다. 대충 떠오르는 생각을 막 쓸 때도 있지만, 내면의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최대한 진실을 끌어내려 노력하며 쓰는 글도 있다.


왜 그러는 걸까? '관종'인 건가?


일단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일기도 (드문드문 이기는 하지만) 계속 써 왔다. 덕분에 가끔 38년 전 일기를 꺼내보며 낄낄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33년 전 일기를 보며 짠한 미소를 짓고, 27년 전 일기를 보며 그 유치함에 얼굴이 빨개지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일기장이 싸이월드로 바뀌었고, 10년 전부터는 블로그가 대신해 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유독 할 말이 많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늘 하염없이 주절대는 긴 글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요?) 그 많은 할 말을 수다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각자 자기 살기에 바쁘고, 자기 고민과 해결해야 할 짐이 있는데, 내 복잡한 상황과 심경까지 풀어놓아 상대를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글을 쓰면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할 수 있다. 읽고 안 읽고는 순전히 읽는 사람의 몫이다. 대화를 할 때는 내가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거나, 조언이랍시고 일장 훈화를 해도 상대방이 중간에 박차고 일어나지 못한다. 다만 나를 싫어하게 될 뿐. 하지만, 별 도움도 안 되는 글을 따분하게 쓰면 스크롤을 쭉쭉 내리거나 그냥 나갈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민폐를 덜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읽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내 사고와 대중적 사고 간의 거리를 알아차리는 법 - 쉽게 말해 눈치 있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조회수 대비 좋아요 수가 적으면 '아, 이건 나 혼자만 신나는 얘기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진실이 아닌 글. 입에 발린 구태의연한 글은 읽는 사람이 알아보고, 나 자신도 분명히 안다. 한 단락을 썼다가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우다가를 반복하다 보면, 내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를 읽다 보면 참 놀랍다. 밀린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느라고 지어낸 글, 선생님을 의식하고 모범생처럼 쓴 글, 당시 유행하던 책 '비밀일기'를 읽고 감정이입이 되어 껄렁껄렁하게 쓴 글 등. 읽는 동안 당시의 상황과 일기를 써 내려가던 내 모습, 떠올랐던 감정까지 35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정확하게 기억난다.


어린 시절 일기를 보며 얼굴이 붉어지듯, 내 블로그 글을 보며 한 없이 창피해질 때도 많다. 사람은 계속 변하니까.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1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내가 아니다. 불과 한 두 달 전에 쓴 글인데도 '아, 내가 이렇게 생각했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는데' 하고 번복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남기는 일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말이 바뀌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서 사람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고 누군가가 조언해 준 일이 있다. (아마, 비공개로 글을 쓰는 친구의 조언이었던 것 같기도...)


그래서 한 동안 말도 글도 신중하게 아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고, 떠오르는 대로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솔직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내 얘기를 기억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각자 자기 살기에도 바쁜 세상 아닌가.


내가 '순 자산 100억을 벌고 싶어요.' 했다가, '나는 돈과 명성에 구애받지 않고, 소로처럼 소박한 생활을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했다가 '나는 우주적 메시지를 전하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거예요.'라고 한 들.


왜 꿈이 자꾸 바뀌나요? 삶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군요. 당신의 변덕이 독자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나요? 하고 따져 묻는 사람이 설마 있겠는가? 있다한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그렇습니다.' 하면 그만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니, 매우 많지만... 조용히 앉아 숨을 쉬고, 글을 쓰며 그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가볍게 살고 싶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쓰며 살 것이다. 욕이든 칭찬이든 크게 개의치 않고. 내 멋대로, 전체 공개로 살 것이다. (라고 다짐해봅니다.)



- 리즈 -


 


 

매거진의 이전글 잔소리하는 수영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