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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02. 2022

잔소리하는 수영장

서비스업 종사자의 마음

어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노원구의 한 수영장에 갔다. 대부분의 건물이 신축인 신도시에 살다가, 구도심으로 건너가니 건물 외관에도 엘리베이터에도 세월의 향취가 묻어났다.


카운터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신분증을 맡긴 후 빨간색 스프링 고리가 달린 열쇠를 받아 쥐었다. 신분증을 맡기라는 대목에서 좀 갸우뚱한 기분이 들었으나 웬만한 일은 수긍하며 살자 마음먹었기에, 순순히 그곳의 방침을 따랐다. 옷장 키를 반납하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게 된 데에는 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으리라.


- 헬스화, 개인 운동화 보관 금지

- 보관 시 강제 정리

- 업장 내 체류시간 최소화


라고 쓰인 안내문을 읽으며 신발을 신발장에 넣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또 다른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타인의 물건에 절대 손대지 맙시다. 인과응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습니다.'


그간 도난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는지, '인과응보' 안내문은 탈의실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역 수칙 위반자, 전기 과다 사용자, 공공 매너가 없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안내문 또한 줄줄이 이어졌다.


옷을 벗고 샤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 서서 나는 벽면을 가득 채운 안내문을 모조리 읽어댔다. 최근 (글자는 무조건 읽고 싶은) 문자 중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영장 주인의 강박적 잔소리에 급 흥미가 당겼기 때문이다.


- 탈의실 내 마스크 착용 필수.

- 샤워 후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

-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필수 착용해주시고 되도록 빠른 귀가 부탁드립니다.

- 음식 섭취 밑 대화를 삼가 주세요.

- 고대기 매직기 등을 사용 금지합니다.

- 개인 전열기구를 개인이 독점하여 장시간 사용하여 민원이 많습니다. (개인 기구는 당연히 개인이 독점하는 거 아닌가? 갸우뚱 ㅎㅎ) 공공장소에서 이기적인 행위를 삼가주시고 적발 시 데스크로 연락 바랍니다.

- 합선 위험. 추가 콘센트 사용 금지 (민원 때문이 아니라 전기세가 아까우신 걸로...ㅠㅠ)

- x 위험 x 물건 올리지 마세요.

- 물 절약 부탁드립니다.

- 샤워는 간단히

- 수압 마사지 금지

- 사람 없는 샤워기 끄기

- 내 집처럼 아껴주세요.

- 오일 금지

- 문화인이라면 오일 금지. 미끄러워 부상 위험

- 대. 화. 금. 지 (샤워장 양 옆 벽면에 한 글자에 A4 한 장씩을 할애해 북한 선전문처럼 빨간 글씨로 넓게 붙여 놓으셨다.)

- 자리 맡기 절대 금지

- 샤워기 물틀고 물 맞기 금지 (딱 필요한 만큼만 물을 맞으라는 뜻으로 예상됨)

- 양치질 금지

- 회원님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양치는 집에서

- 실수로 드실 수 있으니 반드시 샤워하고 수영복 입으세요. (수영장 물을 당신이 먹게 될 수도 있으니, 깨끗한 수질관리를 위해 꼭 수영복 입기 전에 샤워를 하라는 뜻으로 해석됨)

- 수영장 입장 전 손소독제 필수 (정말요?)

- 샤워실 마사지 NO, 고무밴드 NO, 자리 맡기 NO

(운율을 맞추기 위해 고무밴드를 끼워 넣으신 걸까?)

- 에어컨 조작 금지 개인 온도 설정 불가


샤워장을 거쳐 수영장으로 들어가면 각종 위험에 대한 경고와 강습용 보드 등의 기물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하는 또 다른 26개의 안내문이 붙어 있으나, (그렇습니다. 세봤습니다.) 모두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이 정도만 쓰겠다.


안타깝게도 경고문은 제 역할을 못 하는 듯했다. 습관적으로 퍼붓는 엄마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자식들처럼 아무도 그것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안 들어먹을 걸 당연히 알고 내다보지 않는 엄마처럼 관리감독하는 직원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다들 큰 소리로 대화를 하고, 샤워장에서 양치를 하고, 샤워기를 틀어 둔 채로 물을 맞고 (어디까지가 정당한 샤워이고, 어디까지가 금지 된 물 맞기인지 애매하지 않나요?), 합선 위험 경고문 바로 밑 콘센트에 개인 헤어드라이기를 꼽고 머리를 말렸다.


왜 그런 걸까? 이 동네 사람들은 공공예절도 절약정신도 없어서 그런 걸까? 나는 이 것이 과한 잔소리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만약 수영장 주인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꼭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주의사항 한 두 가지만 붙여두었더라면 사람들도 최소한 그 부분만은 지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끄러짐 사고 예방을 위해 오일 사용은 자제해주세요.’ ‘수질 보호를 위해 꼭 샤워 후 입장해주세요.’ 정도.


나머지는 모두 하나마나한 잔소리다. 잔소리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요’의 또 다른 표현이기에 아무 효과도 없이 기분만 상하게 한다. 불신의 표현만으로는 상대방의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상대를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마음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 뜬금없이 웬 사랑?


만약 수영장 주인이 고객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경고문을 여기저기 붙이는 대신, 청소를 더 깨끗이 했을 것이다. 업장을 찾은 손님들이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샤워기 주변과 문틀, 벽면 여기저기 보이는 녹물과 곰팡이를 제거하고,  바닥이 미끌거리지 않도록 세제를 풀어 정성껏 닦았을 것이다. 덕지덕지 청테이프로 보수한 화장실 문을 새로 달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기를 비치하거나, 유료라도 드라이기를 주기적으로 교환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다니는 손님들의 수고를 덜어줬을 것이다.


깨끗이 관리되는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정갈하게 만들고, 넉넉한 배려는 스스로 절약하게 만든다. 주인이 손님의 편의를 좀 더 생각하고 인심을 썼더라면 경고문과 안내문 제작에 그렇게까지 힘쓸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그 낡은 수영장에서 사장님의 권태를 느꼈다. 직업적 소명의식도, 프라이드도 없이 오랜기간 하기 싫을 일을 하다보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근원적 문제 해결보다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말 안 듣는 인간들 때문에 못해먹겠다.'고 투덜대며, 경고장을 추가하며, 하루하루 버티듯 살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에 웬만한 일에는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걸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나무라겠는가? 스스로를 돌아봐야겠다. 우리 회사는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을 충분히 실천하고 있는지, 나는 아이에게 잔소리가 아닌 모범을 보이는 엄마인지. 남편에게 잔소리가 아닌 영감을 주는 아내인지.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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