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희 Dec 11. 2022

제주에서, 완벽한 하루

제주에 왔다. 서율이가 작년에 다니던 학교에서 후원하는 1박 2일 캠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선흘초 6학년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참가비도 없는 캠프인데 선생님들이 기꺼이 허락해 주셔서 깜짝 게스트 형식으로 아이를 보내게 되었다.



친구들이 다 모였을 때 깜짝 등장하고 싶던 서율이는, 엄마의 스케쥴 때문에 30분 일찍 데려다줄 수 밖에 없다고 하자 그에 맞게 계획을 수정했다. “그럼 아이들의 반응을 한 명 한 명씩 봐야겠네요. 몰카처럼.” (아, 이 주어진 상황을 바로 수긍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는 재능. 자랑스럽다. 내 아들)



서율이를 모임장소인 학교 후박 나무 아래 덩그라니 내려 놓고, 나는 제주 서쪽 곽지로 향했다. 관광객들은 제주에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동서를 누비지만, 제주에 주소지를 둔 (혹은 둔 적이 있는) 사람이 동쪽 함덕에서 서쪽 곽지를 가는 것은 서울 사는 사람이 도봉산을 두고 설악산에 가는 것 만큼이나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오늘 큰 맘을 먹은 이유는 바로 곽지 집의 새로운 세입 후보자에게 집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친구가 곽지에서 3년간 운영하던 숙소 사업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고, 나는 각종 규제로 매매와 임대 시장이 꽁꽁 얼어 붙은 이 시기에 집을 팔거나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사실 이 정도 위치와 조건이면 매매던 임대던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찰보다 대출에 의존해 집을 계약한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은 종부세 문제도, 대출 규제도 이율도 만만치 않아서 선뜻 다가구 주택을 통으로 매입하거나 임대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여러 사람들이 집을 보고갔으나 금융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세금을 빼주어야 할 시기가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나는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필 이럴 때에 이사를 가겠다는 친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오늘 집을 보여줄 겸, 친구의 근황도 들을 겸 오랜만에 찾은 곽지. 게스트들과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나간 친구를 기다리며 집을 찬찬히 둘러보고 바닥에 앉아서 명상을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깊고 깊은 고요함이 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인연과 때가 있는 법.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노력하지 말자. 어떻게 일이 흘러갈지 그냥 지켜보자.’



친구가 3년간 살며 운영해오던 공간은 세심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오픈 할 때 찍었던 사진과 전혀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아늑했고 정성어린 손길이 느껴졌다. 친구에게 품었던 속좁은 마음은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밥을 먹고 왔다는 친구를 앞에 앉혀두고, 손흥민을 주제로 수다를 떨며 고사리 육개장을 뚝딱 한 그릇 먹었다. 든든해진 배에 손을 얹고 친구와 함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를 하자니, 모든 시름을 내려 놓은 여행자가 된 듯 즐거워졌다.



카페 주차장에 도착하자 신나는 기분에 추임새라도 넣듯 영화같은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책을 팔고 있는 미니밴 하나.



이동 도서관은 봤지만, 이동 서점이라니. 그것도 다마스. 북다마스. 이렇게 창의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을 볼 때 마다 나는 기분이 참 좋아진다. 규모와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런 독창성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존경스럽다. 가까이 지내고 싶고, 닮고 싶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라는 질문을 천번도 더 들었겠지만 나는 결국 그런 식으로 말을 건넸다. 미소년같은 사장님은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사람 특유의 내성적인 목소리로 “말하자면 좀 길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제가 쓴 책도 있어요.” 라며 수줍게 책 한권을 가리켰다.



진정한 세일즈 맨은 말을 아낀다 했던가. 이 수줍은 청년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물씬 솟아올라, 책을 한 권 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인도 받고
기념 사진도 찍고
책을 구입한 덕에 애플 시나몬 티를 10프로 할인된 가격에 마셨다.


저녁 무렵, 한림 시장 <참나무 장작구이 김서방>에 들러 한방 통닭 한 마리를 샀다. (PPL 아니다. 왠지 공유하고 싶은 상호일뿐) 그리고 친구네 집에서 닭 안주에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목 놓아 불렀다. 각자 고른 노래를 번갈아 듣고, 곧 오십으로 치닫고 있는 서로의 삶을 응원했다.



세수를 하고 간단히 요가를 하고, 엎드려 누워 북다마스 사장님의 책을 읽었다. 글도 참 맛있게 잘 쓴다. 유튜브 제작기가 담긴 57페이지를 읽다가 유튜브를 찾아 구독했다. 당분간 이 분을 덕질하며 영감을 얻을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온 가족이 함께 제주에 내려올 계획이다. 한 두달 선흘에 살면서, 오랜만에 레이지마마에 오신 엄마들과 좀 어울려봐야겠다. 나는 이미 늙어서 입만 열면 꼰대같은 거라는 걱정 대신, 그녀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미루던 명상 클럽도 어찌됐든 시작하고, 북클럽도 해봐야지. 마당에서 불멍하며   고구마도 구워 먹어야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있었던 아주 작은 순간들이 내 삶을 들어 다른 섹션으로 이동시킨 느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철로를 바꿔 탄 기분이랄까? 혹시 이거슨 리얼리티 트랜서핑?



어제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는데, 기분이 좋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 우연히 맺어지고 이어지는 인연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늘 내가 뱉은 말 “잘 쓰는 것 보다 어쨌든 뭐라도 쓰는 게 중요하다.“ 를 떠올리며 이렇게 새벽 세시에 핸드폰으로 꾸역꾸역 일기도 썼다.



완벽하다.

오늘 하루.





매거진의 이전글 한 여름 밤의 꼬치 어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