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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Dec 12. 2022

제주 함덕에서 1500원으로 누리는 호사

카페에서 사 마시는 커피값에는 재료비뿐만 아니라 인건비, 공과금, 가게의 임대료가 포함된다. 목이 좋은 상가는 임대료가 비싸고, 그만큼 커피 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관광업이 주요 산업인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권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다 뷰가 나오는 곳이다. 그 중의 최고봉은 해수욕장 뷰.


인천 영종도만 해도 신도시 한복판에는 컴포즈 커피나 빽다방 같은 저가형 카페가 즐비하지만, 바다가 보이는 카페의 커피값은 최소 6,000원에서 9,000원 정도를 받는다.서해라서 썰물일 때 가면 바다 뷰라기보다 뻘뷰에 가깝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닷물이 들어차 있던 시커먼 자리를 바라보며 뷰 값을 지불하는데 이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만 오면, 뭐랄까? 황송한 심정이 된다. 갯벌도 아니고, 비린내 나는 항구도 아니고, 암석으로 뒤덮인 우중충한 바다도 아닌... 그야말로 에메랄드 빛 바다와 백사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뷰를 합당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누리는 것 같아서다.



우리 집이자 회사인 레이지마마에서 가장 가까운 번화가는 함덕 해수욕장이다. 그래서 이곳에 점심을 먹으러 나오기도 하고, 마트에 장을 보러 오기도 하고, 좀 걸으러 오기도 한다.


함덕 해수욕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루스트 플레이스는 기름기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제주형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가 위치와 음식의 퀄리티에 비해서 가격이 지나치게 저렴하다.


등심 돈가스의 가격이 7,900원인데, 런치 타임에 오면 그나마 5,900원이다. 생맥주 한잔은 1500원인데, 한창 공격적일 때는 500원 일 때도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과 그 보다 싼 맥주 가격으로 점심을 먹으며 특급 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오지라퍼인 나로서는 이곳에 올 때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해서 남는 게 있을까? 얼마 못 가 문 닫으면 어떻게 하지?' 더 걱정되는 것은 이 5층 건물의 모든 상가를 한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3층은 레스토랑, 1, 2, 4, 5층은 계열사인 에이바우트가 운영하는 카페다. 카페 또한 저가 정책을 표방하고 있어서, 조각 케이크와 커피세트를 4,900원에 판다.



이곳은 직영점일까? 체인점일까? 직영점이라면 본사가 이 건물을 매입한 걸까? 임대한 걸까? 가맹점이라면 점주는 건물주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가격대로 임대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거야. 건물주는 이 지역 토박이이실 확률이 높다. '바다가 다 똑같지 뭐. 그래 봐야 시내에 비하면 시골 촌구석인데.' 라며,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데 익숙한.



그런데, 오랜만에 제주에 오니 내 오지랖을 자극하는 카페가 또 한 군데 들어서있었다.



바로 빽다방 함덕점



몇 달 전에 바닷가 바로 앞에 빽다방이 들어선다는 플래카드가 붙은 공사 현장을 본 적이 있다. 아메리카노 한잔에 1500원을 받는 저가형 카페 브랜드이기에 당연히 테이크아웃 상점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가보니 5층 건물 전체가 빽다방이었다. 2층에서 커피를 주문해 위로 올라가 보니 푹신한 소파들이 창을 보고 늘어서 있다. 게다가 이 뷰는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매장에서 마시는 커피 가격은 조금 더 받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똑같이 1500원이다. 그야말로 황송함의 극치다.


오늘 한 시간을 앉아 관찰한 바, 빽다방의 주요 이용자는 40~60대. 커피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한 잔에 4, 5천 원씩 주고 사 먹을 거 있나? 라는 합리적 소비관을 드러내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연배의 손님들이다. (나도 그중 하나) 혹은, 체면 차릴 일 없는 가족 여행객이나 남자끼리 온 친구들.


카운터 바로 위층은 사람이 가장 많고, 오늘은 마침 단체 관광을 오신 분들이 점령하여 도떼기시장 같았는데 한 층씩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의 여유가 있었고 루프탑에는 제법 빈 소파가 보였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우리 일행은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3인용 소파와 1인용 안락의자가 놓인 4층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20분쯤 이야기를 나눈 후 일행은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계속 남아 책을 좀 읽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혼자 차지하기엔 지나치게 자리가 컸다. 1인 여행자들을 위한 자리로 보이는 높고 긴 테이블에는 누군가의 소지품들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예쁘장한 여자 한 분이 서 계셨다. '제가 혼자 있기엔 자리가 좀 큰데, 일행분 계시면 자리 바꿔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이 "아, 저도 혼자인데... 그럼 같이 앉아도 될까요?" 했다.


창문 밖이 온통 바다인 제주의 카페에서, 혼자 여행 중인 낯선 여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자니 꽤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타인과 합석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의 한 에스프레소 바에서 일요일 오후를 나른하게 즐기는 여피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쉽게도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기지개를 켜며 옆자리를 흘깃 봤는데, 나의 상상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가족 세 명이 소파에 사선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시어머님 또는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 온 부부인 듯했는데, 타이트 한 일정 소화 후 낮잠이 필요하셨나 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앉을자리를 찾아 서성이는 가운데, 파노라마 바다 뷰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소파 두 개를 차지하고 일행이 일제히 잠들어 있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


테이블을 정리하러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직원들도, 자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손님들도 감히 그분들께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좀 양보해 주십사, 적어도 이렇게 누워서 숙면을 취하지는 말아주십사 부탁하지는 못했다. 괜히 껄끄러운 상황을 초래해 기분을 망치고 싶은 사람도 없고, 카페에서 자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안타까웠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아름다운 섬 제주가, 그 비싼 하와이 와이키키 비치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는 함덕 비치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너무 헐값에 소비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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