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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Dec 17. 2022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반성문


두 달하고 이틀 후면 20년째 되는 날이다.


대단하다.


20년이라 하면 핏덩이가 자라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는 시간. 한 사람의 몸과 인격과 정체성이 형성되어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기능하게 될 만큼의 긴 세월이다.


그 시간을 생판 남이었던 (게다가 뇌의 구조와 호르몬의 양상이 확연히 다른) 한 남자와 살아왔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함께 각종 문제를 해결하면서 말이다.


엄청난 일을 해 낸 것 같다. 한편으론, 세상의 모든 엄청난 일들은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꾸역 꾸역 해나간, 하루하루가 쌓여 이루어진 것들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었나? 40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가석방된 무기징역수가 자유의 가벼움을 못 이겨 결국 자살하고만 이야기. 이미 자유로운 사람은 구속과 억압이 주는 압박감이 괴롭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압박의 무게가 중력처럼 일상이 되어 버리면 자유의 후련함도 고통이 되나 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래서 참 무섭다.


그래서 버텼나 보다. '저 사람에게 익숙해지기 싫어!' '이 상황에 익숙해지기 싫어!' 하면서 내 방식을 고집했나 보다. 나는 길들여지기 싫어하면서 남편은 고치려고 들었다. 내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그가 바뀌면 문제가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앞으로 가정을 지키고 잘 살아가려면 당신이 변해야 해. 애들이 잘 크려면 당신이 변해야 해. 내가 불행한 건 당신 탓이니 당신이 변해야 해.' 하면서.


남편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이 사는 방식을 고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찮은 일들에 고집을 부려가며 수도 없이 싸웠다. 하지만 내 말빨이 더 셌고, 내가 걸핏하면 울었기 때문에 그는 주로 한숨을 쉬며 자신의 세계로 숨어드는 방식을 택했다. 그에게도 공간이 필요했을텐데 나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못했다. 왜 문제를 회피하는데? 왜 나만 노력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버티면서 꾸역 꾸역 살다 보니, 곧 20년이 된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저 받아들이다 보니 결혼 생활의 불편함이 어느덧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가석방되기 싫은 무기징역수처럼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후련함 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얼마 전 남편이 고기를 굽는데 옆에서 보던 내가 '아이가 배고파하고 프라이팬의 여유도 있으니, 목살 한 줄을 더 올려놓아도 되지 않겠냐?'라는 의견을 정중히 제시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그것은 정중한 잔소리 일뿐. 고기 굽는 문제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아내의 불필요한 참견으로 들릴 뿐이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라는 그의 말투에 약간의 힘이 느껴졌다. 불쑥 올라온 짜증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힘. 작은 일을 발단으로 괜한 감정적 불화를 만들어서 저녁 시간을 망치지 않고자 노력하는 힘.


남편은 분명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에고는 남편의 노력을 못 본척하고 이렇게 속삭인다. '이게 발끈할 일인가?' 나 역시 괜한 감정적 불화를 만들어서 저녁 시간을 망치지 않고 싶지 않았지만, 내 얼굴의 근육은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굳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다. 약 10초간 정적이 감돌았다.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만 주방을 가득 메웠다.


그 불편한 정적을 깨고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지내다 보면 잔소리도 그리워지더라. 별 뜻 없이 한 말들에 나는 왜 발끈했을까? 후회도 되고."


아. 남편은 나에게 길들여졌구나. 내 잔소리가 없으면 허전해지는구나.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고, 남편이 애처로워졌다.


사실 나도 그렇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없이 잠드는 게 힘들다. 그의 아재개그에 ’대체 왜 그러느냐‘고 한숨을 쉬고, 함께 음악을 들으며 이건 어느 곡 표절이네 아니네 싸우고, 설거지 건조대에 그릇을 정리하는 방식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투닥투닥 할 사람이 없으면 허전해서 어쩌나싶다.


20년간 우리는 이만큼 익숙해졌다. 4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가석방된 무기징역수처럼 자유를 두려워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즘 '현타가 왔다.'라는 말을 자주 쓰던데, 이 상황에 적절한 표현일까?) 이제 길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 ’사랑은 서로를 길들이는 거야'라는 <어린 왕자> 속 대사가 사실은 교활한 여우의 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우에게 나는 이렇게 반론하고 싶다.

"여우야,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나 없이 못 사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드는 게 아니란다. 한 사람의 완전한 인간으로 홀로 꽃피울 수 있도록 믿고 지지하고 바라봐 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이야."


나는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내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모든 노력을 중지해야한다. 홀로 설 수 있게 도와야한다. 우리는 언젠가 이별하게 될테니까. 자식이 집을 떠나면 우리는 남겨진 부모가 되고, 남편이 먼저 떠나면 나는 남겨진 아내가 될 것이다.


혹시 내가 먼저 떠난다면... 남편이 날 그리워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가끔만 그리워하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운동과 취미를 즐기고, 마음이 단정한 여자를 만나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다.


혼자 어찌할 바를 몰라 막 살다가, 외로움을 달랠 목적으로 또는 살림의 어려움을 나눌 목적으로 아무나 막 만나서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에게 더욱 열심히 살림을 시켜야겠다. (감동적인 글을 쓰고 싶었는데, 왠지 또 삑사리를 낸 것 같군요.)


지난 20년간 아이를 낳고 키우고 가정을 꾸리면서 많은 부분을 희생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근본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바꾸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반대 때문에 하고 싶은데 못 한 일도 없고,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한 적도 없다.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야기의 감동적인 마무리를 위해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에게 참 감사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가 나쁜 년이오.

그간 내가 당신을 가스라이팅 해 온 것 같소.'


오늘 아침 이런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류시화 선생님의 책에 실린 한 구절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겠지만, 이제야 비로소 가슴에 와닿으며 나를 반성하게 한 문장.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이다.
- 류시화



이 문장을 마음에 딱 새기고, 누군가에 대해 불만이 생길 때 마다 꺼내어 나 자신에게 속삭여줘야겠다.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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