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본 것보다 안 해 본 게 훨씬 많은 나이, 스물두 살.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했다. 하룻밤 15달러짜리 백패커스도 처음이었고,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방을 나눠 써야 하는 도미토리도 처음이었다. 방에 들어가서야 알게 됐다. 이 방은 남녀 공용이구나. 이 좁은 방에서 여섯 명이 지내야 하는구나.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쯤 되는 정사각형 방에 이층 침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침대와 침대 사이 두 발자국도 안 되는 공간에 옷가지와 신발들, 커다란 배낭들이 널브러져 있다. 흙 묻은 작업화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창문과 이웃한 침대들은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문 바로 옆 2층 자리에 짐을 올렸다. 면 시트가 덮여 있는 다른 침대들과는 달리 내가 누울 자리에는 헐벗은 매트리스 뿐이었다. 낡은 매트리스의 구멍 사이로 누런 스펀지가 봉긋 드러나 있다.
철재 계단에 발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갔다. 끼익 끼익. 휘청거리는 침대에 가까스로 앉았다. 매트리스 위의 갈색 얼룩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매니저가 준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자야 하나? 단 한 번의 세척도 없이 최소 10년은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매트리스 위에 그냥 맨 몸을 누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사실 담요도 덮을 엄두가 안 나긴 마찬가지였다. 언제 빨았을까?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짙은 남색의 담요. 가끔 빨기는 빠는 걸까? 걱정이 됐다. 두 장 있는 수건을 얼굴 닿는 베개 위에 하나, 상반신 밑에 하나 깔고, 옷을 잔뜩 껴 입고 자야 할까?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삐걱대는 침대 2층에 앉아 내가 처한 현실을 내려다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엄마가 깨끗하게 빨아 풀을 매겨 둔 장롱 속 이불 들과 푹신한 매트리스를 두고. 나만의 책상과 옷장과 창문을 두고. 나는 도대체 뭘 기대하고 여길 온 걸까?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큰 한숨으로 눌러 삼켰다. 바닥에 깔고 잘만한 옷 가지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자니, 끼익 하고 방문이 열렸다.
작업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쓰윽 들어온다. 뿌옇게 먼지가 쌓인 머리를 털며, 흙투성이 신발을 그대로 신은채 내 대각선 맞은편 아래 침대에 걸터앉았다.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정말 여기서 잘 수 있을까? 여긴 여행자 숙소라기보다 불법 노동자들의 임시 거처 같은 곳이 아닐까?'
"Hi 안녕"
그가 인사를 건네며 내 쪽을 올려다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흠칫 놀라 물었다.
"Are you alright? 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무서워. 아까부터 무서웠는데 너 때문에 더 무서워.'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엉엉 본격적으로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란하게 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큰 키에 회색 장발을 포니 테일로 묶은 백인 남성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남자는 그나마 작업복 차림은 아니다. 적어도 불법 노동자는 아닌 것 같다. 한 손에 CD 플레이어를 들고, 이어폰을 꽂은 채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Hey, Bro! How's it going today? 안녕. 친구! 오늘 어땠어?"
노동자는 말없이 턱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장발이 이어폰을 빼며 쓰윽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노동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동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장발이 다시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괜찮아?"
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추슬렀다. 정신 차리자. 연희야.
"안녕. 나는 한국에서 왔어. 배낭여행이 처음이라.. "
내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 하자, 장발이 가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오~ 쭈쭈쭈. 아가구나. 괜찮아. 익숙해질 거야. 곧 익숙해져. 노 프라블럼"
두 사람은 곧 내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자기들만의 빠른 대화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옷 가지를 주섬주섬 다시 가방에 챙겨 넣었다. 믹스드 도미토리는 남녀 혼성을 말하는 거구나. 여성용 도미토리로 가자. 하루에 3달러만 더 내면 되잖아. 차라리 밥을 굶자. 여기선 못 지내.
"헤이, 가이즈!" 경쾌한 목소리에 아래를 보니,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여자가 큰 목욕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들어왔다.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빠른 영어로 남자들과 속사포처럼 떠들어 대더니, 내 쪽을 곁눈질로 올려다봤다.
이 숙소에서 만난 첫 번째 여자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케이"
그녀는 내 쪽을 흘끗 보며 턱을 살짝 추켜올리더니, 수건을 풀어 머리를 말리며 다시 남자들과 수다를 떨었다.
오케이?
오케이라고?
뭐 저런 싸가지가 다 있지?
노동자 맞은편, 커다란 천이 커튼처럼 둘러진 1층 침대가 그녀 자리인가 보다. 그녀는 둘러져 있던 천을 둘둘 말아 2층 난간 사이에 끼우고,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에 로션을 바르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나만 못 알아듣는 영어로.
그래도 방 안에 여자가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녀의 매트리스 위, 노란색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널브러진 화장품, 원피스, 옷가지들이 방 안의 공기를 살짝 바꿔놓았다. 거기에 진한 샴푸 냄새, 높은 톤의 수다까지 가미되니 수용소 같았던 방이 조금은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싸가지없고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녀 덕분에 두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불법 노동자 공사장 인부와 히피 아저씨, 까칠한 인종차별주의자. 눈 딱 감고 이 방에서 하루만 지내볼까? 지금은 1달러라도 아껴야 하니까. 생각보다 괜찮을 지도 몰라. 정 안 되겠으면 내일 옮겨 달라고 하지 뭐.
배낭을 여미다 말고 망설이며 앉아 있는데 싸가지가 물었다.
"You don't have a sheet? 너 시트 없어?"
"Sorry? 뭐?"
"Sheeeee~t! Bottom sheeeeeeet for your maaaaat 시트! 매트에 까는 바닥 시트!!!"
그녀는 자신의 노란 매트리스 커버를 가리키며 물었다.
"No.없어.“
싸가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맨발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에 연한 핑크색의 천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꾸러미를 내 침대 위에 턱 하니 올리고, 자기 침대 쪽으로 걸어가 티셔츠를 홀랑 벗어 젖혔다. 방안의 남자들은 늘 있는 일인 것처럼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싸가지는 브래지어만 걸친 상태로 겨드랑이에 데오도란트를 바르더니, 배낭을 뒤적여 원피스를 꺼내 꾸물꾸물 입었다.
충격적이었다. 서양 여자 애들은 과감하구나. 남자들이 있는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는구나. 여긴 이게 자연스러운 거구나.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가는 나만 촌년 취급 당하겠구나.
천 꾸러미를 펼쳤다. 고무줄이 달린 매트리스 커버와 담요 아래 까는 시트 한 장, 깨끗한 베개 커버까지 있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랬다고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거 혹시 돈 내고 빌리는 거야?
"아니. 원래 주는 거야."
"나는 안 주던데."
"(매니저) 쟤가 좀 멍청해."
"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오케이"
싸가지 없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인종차별 주의자는 아니었다. 말이 빠르고, 새침하고,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동양에서 온 어리버리한 여행자를 발 벗고 챙길 줄 아는 그녀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진정한 츤데레였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20대의 내가 갖고 있던 사람에 대한 편견들. 나의 빈약한 예측은 그날 이후 매일 조금씩 깨져 나갔다.
- 리즈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