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말리고 원피스로 갈아입은 싸가지는 화장품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갔다. 서양 여자애들은 남들 앞에서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버젓이 남자애들이 있는 방에서 속옷 바람으로 옷은 잘 갈아입으면서, 화장하는 모습은 트지 않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브래지어나 수영복이나 노출 정도는 비슷하니까. 속옷도 옷이라 치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싸가지 덕분에 내 침대도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매트리스와 베개에 커버를 씌우고, 살에 닿기 싫었던 담요 아래 시트를 깔아 놓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노동자는 샤워하러 갔는지 수건을 들고 사라졌고, 장발 아저씨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엔 콜라를 들고 눈을 감은 채 과자를 열심히 씹고 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그에게 가까운 슈퍼마켓이 어딘지 물어보려다 말이 길어질까 봐 일단 나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허리 가방에 여권과 현금, 비행기표 등 귀중품이라 할만한 것들을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밖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다들 식사할 무렵이니 7시쯤 밖에 안 됐을 텐데 길에 사람이 없었다. 저 아래 불빛, 상점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라피티로 가득한 벽면을 따라 걷자니, 마치 영화 속에 들어선 기분이다. 로맨틱 코미디 말고, 갱스터 영화. 어디선가 강도가 칼을 들고 나타나 기습적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혹은 후드티를 입은 20대 청년 서너 명이 빙 둘러싸며 현금을 갈취하는… 도시 범죄물 말이다.
여기서 강도를 만나면 난 끝장이다. 여권과 비행기표와 전 재산이 힙색 안에 다 들어 있다. 이걸 뺏기면 그야말로 국제 미아, 호주 거지가 된다. 상상이 낳은 공포가 점점 더 커졌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꾸만 좌우를 살피고 뒤를 돌아봤다. 그냥 돌아갈까? 돌아가기엔 여기까지 온 게 아깝다. 남은 거리는 약 300미터. 뛰었다. 조깅하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대며 도착한 곳은 슈퍼마켓이 맞았다. 꽤 규모가 크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들이 하나도 없다. 안쪽에 불은 켜 있는 것 같은데 문이 잠겨 있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벌써 문을 닫아? 브리즈번은 꽤 큰 도시라고 들었는데… 혹시나 해서, 출입문을 흔들어 보고 있는데 뒤에서 한 아저씨가 큰 소리로 말했다.
“They are closed. 닫았어. 여섯 시에 닫는다고 거기 쓰여 있잖아.”
“휴… 이 근처에 다른 마트는 없어요?”
“다 닫았지. 주유소 가 봐. 저 쪽으로 세 블록 가면 주유소가 있고 그 안에 작은 샵이 있어.”
“고맙습니다.”
차라리 굶기로 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지만 이 어둠을 뚫고 혼자 더 멀리 걸어갈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길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아까보다 조금 덜 무서웠다. 뛰다 걷다 하니 금세 숙소에 도착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 공용 주방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난다. 뭔가를 요리하는지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도 났다. 가볼까?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방으로 향했다. 배고플 땐 일찍 자는 게 상책이다. 마트가 여덟 시에 문을 연다니 일곱 시에 일어나 달려가야지.
방에 들어가니, 싸가지가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부츠의 끈을 꿰고 있었다. 눈 밑을 까맣게 칠하고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모습은 아까 길에서 상상한 갱스터 무비의 한 장면에 꼭 어울릴 법한 모습이다.
노동자의 침대엔 웬 미소년이 누워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티셔츠를 입고 갈색 뿔테 안경을 쓴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길고 탄탄한 다리. 무릎에 책을 얹고 젖은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는 처음 보는 동양인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가에 함박 미소를 머금은 채. 떠듬떠듬. 일본어로.
리즈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