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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1997 -4편. 공짜 숙식의 길

by 레이지마마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일단 발걸음을 내디디면 삶은 언제나 마법처럼 길을 터준다.


(3편에 이어서)


왜 못 알아봤을까? 저 뽀얀 얼굴. 이지적인 눈매. 웃을 때 입꼬리에 살짝 패이는 보조개인지 주름인지 모를 매력적인 입매를. 저 남자를 보고 내가 공포에 질려 울었다니. 때 묻은 작업복과 먼지로 뿌연 머리, 흙 묻은 장화에 눈이 흐려져,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구나.


그의 이름은 제이크. 제이크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일본인 여자애는 미키라고 했다. 둘 다 언어 학습에 대한 의욕이 충만한지, 미키는 계속 영어로 말하고 제이크는 더듬더듬 일본어로 대화했다.


침대에 올라가 굶주린 배를 잡고 누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제이크는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고, 일주일쯤 뒤에 울룰루라는 지역으로 떠날 예정이란다. 사막 한가운데 에어즈락까지 가는 캠핑 투어를 예약할거라 했다. 미키는 이미 그곳을 다녀왔단다. 일곱 명 정도가 함께하는 투어였는데 일행 중 신혼부부가 차에서 결혼반지를 잃어버려 부인이 울고 불고, 분위기가 내내 싸했단다. 그래도 사막에서 본 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며, 미키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꼭 쥐고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칫. 계집애 아양 떠는 것 좀 봐.


그녀가 사막의 별을 회상하며 행복해하는 동안 나는 배가 고파 울적했다. 앞날이 걱정이었다. 여기가 브리즈번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인데… 돈 떨어질 때까지 여기만 있다가 돌아가야 하나? 오래 버티려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할 텐데. 영어로 하는 일을 구할 자신은 없고, 내일은 한인 식당이라도 돌아다녀봐야겠다.


아, 배가 너무 고프다. 목도 마르다. 룸메이트들에게 내일 갚는다고 하고 물 한 모금, 과자 한 조각만 달라고 말해볼까? 망설이다 눈을 감았다. 저 잘생긴 남자 앞에서 미키처럼 애교는 못 떨 망정 구걸을 할 수는 없지. 눈은 감았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배가 고프니 확실히 더 서럽다.



굿모닝!


일어나자마자 마트에 달려갔다. 작은 베이커리에서 하루가 지나 떨이로 파는 50센트짜리 식빵을 샀다. 숙소로 돌아와 주방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빵에 잼을 바르는 중이었다.


긴 노란 머리를 드래드로 땋은 남자와 갈색 쇼커트 여자 커플이 맞은편에 앉았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했다. 이즈리얼에서 왔으며, 6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즈리얼이 어딘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작은 책자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회의를 했다. “이 집 어때?” “오. 좋네. 개도 있대. 래브라도래.” “여기도 좋은 거 같아. 스쿼시 팜. 거리도 적당하고.” “오케이. 그럼 여기랑 여기랑, 저기. 일단 세 군데 전화를 해 보자.”


고개를 든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 이즈리얼 사람들에게는 비자를 길게 주나 봐. 나는 6개월 받았는데…


딱히 궁금해서라기보다, 무슨 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던진 말이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대책 없는 인간인지.


- 우린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왔어. 1년짜리.

- 그게 뭐야?

- 합법적으로 주 20시간까지 일하면서 여행할 수 있는 비자야. 너는 무슨 비자로 왔어?

- 관광비자

- 아, 일 안 할 거면 관광비자로 여행하면 되지.

- 관광비자로는 일 못해?

- 하하하. 원래는 불법이지. 캐시 받고 일할 곳을 찾으면 되지만. 농장 일은 대부분 캐시잡이니까 하려면 할 수는 있어.

- 농장 일은 어디서 구해? 나 돈이 없어서 일자리를 꼭 구해야 하거든.

- 다니다 보면 어디서 무슨 수확을 한다더라 하는 정보가 여기저기서 들릴 거야. 우리는 당분간 우프 하려고.

- 우프는 뭐야?


그러자 그들이 앞에 있던 책자를 내밀었다.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


- 유기농 농가와 여행자를 매칭시켜주는 여행 프로그램이야. 하루 서너 시간 일을 도와주면 숙식을 제공해 줘.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책을 펴 보니 각 지역별로 지원자를 구하는 농가의 리스트와 전화번호가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두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스쿼시 농장. 소소한 집안일이나 텃밭 가꾸기, 문화 교류를 위한 호스팅”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유기농 채소 농장. 하루 4시간 작업. 젊은 우퍼 많음. 아이 사절”

“말을 기르는 목장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물 돌보기와 마구간 청소. 캠핑카 숙소 제공.”

“예술가 가족이 운영하는 숲 속의 농장. 최근 이주한 커플이 낡은 집을 수리하고 있음. 뒷정리와 재료 준비 등 간단한 일을 도와줄 사람. 식재료 또는 식사 제공. 공짜 맥주!”

와. 딱 나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엔 영어에 자신이 없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도 없고,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한 버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여행자 말이다. 시골에 살면 돈 쓸 일도 없을 테고, 농장에서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면 영어도 많이 늘겠네.


- 이 책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

- 회원 가입을 하고, 가입비 25달러 인가를 보내면 우편으로 책자를 보내줘.


돈을 송금하려면 통장을 개설해야 하고, 우편으로 책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하염없이 돈을 까먹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책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 정말 미안한데. 이 책 잠시만 빌릴 수 있을까? 내가 사실 책이 올 때까지 기다릴 형편이 안되거든. 매니저에게 부탁해서 호주 동부 지역 리스트 몇 장만 복사를 좀 할게. 플리즈~


방금 처음 만난 여행자들에게 그들도 돈 주고 오랜 시간 기다려서 샀을 책자를 공짜로 복사하겠다는 부탁을 하는 것이 염치없다는 건 알았지만, 염치를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도 쿨하게 책을 내밀었다.


- 그래. 그렇게 해. 사실 이 것도 누가 떠나면서 주고 간 책이야. 그런데 여기선 복사기 사용 허락 안 해줄걸?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는데, 1층에 무료 복사 서비스가 있어. 시청에 가면 장거리 전화를 공짜로 쓸 수 있는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 줬구나. 평소에 기도 같은 건 잘하지 않지만, 이런 순간에는 마음속으로라도 '할렐루야'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이 날 이후로도 자주 생각했다. 호주는 역시 배낭 여행자들의 천국이라고. 다들 가난하고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아서, 기꺼이 서로 돕는 천사들이 되는 곳. 그래서 가난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곳.


우연한 도움 덕분에 나는 한동안 우프로 여행하는 사람 - 우퍼가 되었다. 다음 편부터는 나의 우프 경험담을 회고해 보겠다. 30년간 짓고 있다는 호주의 농가, 암을 레모네이드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독일인 할아버지와 그 곳에서 만난 스위스 VJ 청년 이야기.


*** WWOOF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는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으로, 도시 사람들이 유기농 농장에서 일손을 돕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으며 농촌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현재, 전 세계 130개국 이상에서 운영되고 있다. 나이 제한 비자 제한이 없어 (돈 받는 일만 안 하면 됨) 해외의 농장에서 생활하며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강추한다. 1997년 당시에는 홈페이지가 없어 책자를 이용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호스트를 찾아 연락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우프 글로벌 연합 https://wwoof.net

우프 오스트레일리아 https://wwoof.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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