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올레길

by 레이지마마

올레 1코스를 걸었다. 해안 도로를 따라 걸으면 1km도 안 될 거리를 꼬불꼬불 마을로 들어갔다, 오름을 오르내렸다 하며 에둘러 걷는다. 올레길은 일부러 느리게 걷는 길이다. 덕분에 직진 했으면 보지 못 했을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어느 집 마당의 가지런한 빨래, 까만 흙 위로 봉긋 솟은 무의 행렬, 오솔길을 정비하는 고마운 분들, 산 꼭대기에서만 보이는 제주의 조화로운 색감.


그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이 즐겁다가도, 가야할 길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이 급하면 발걸음이 빨라지고, 발걸음이 빨라지면 몸이 지친다. 몸이 지치면 투덜대는 마음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집 놔두고 왜 나와서 이 고생이야?

아니 왜 길을 이렇게까지 돌아가게 만든거야.

무릎이 아픈데 다 걷는 건 무리 아닐까?


그럴 땐, 완주를 향한 의지보다 언제라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도움이 된다. 남은 앞 길을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지치지만, 당장 발 밑에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멈출 이유조차 쓰윽 사라진다.


안내서에 따르면 올레 1코스는 15km, 평균 3~4시간 거리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아 네월아 여섯 시간을 걸었다. 중간에 만난 한식 뷔페에서 반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성산일출봉 앞 카페 빈백에 누워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종착점을 불과 2km 남겨두고는 ‘그만 돌아갈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끝까지 다 걸었다.


여섯 시간 꼬박 걸어온 길을 버스로 되돌아가는 데는 고작 11분이 걸렸다. 허탈해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땀 흘리지 않고 쉬엄쉬엄 놀면서 걸었기에 억울하지는 않다.


2026년 2월 20일

레이지마마 리즈

매거진의 이전글그래도 비즈니스 클래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