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어쩌면!
절대로 이혼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결혼 생활이 더 버겁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 포근하고 따뜻하게 신고 있던 양말도 "당신은 이제 평생 이 양말을 벗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답답한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좀 덜 답답한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는 그랬다.
생각을 바꿔보자.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 소파에 푹 박혀 대꾸도 안 하는 군!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밤 12시 전에 들어오는 날이 없군. 가정생활이 족쇄처럼 느껴지나 보지? 왜 나만 이러고 살아야 해?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어 불행하다면 당장이라도 이혼할 수 있다.
다만, 신중할 뿐이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 결정으로 인해 아이가 입게 될 상처와 여파가 너무 크기에, 감정적으로 이혼 서류를 들이밀기 전 가만히 앉아 헤어진 후를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자신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따져본다.
이혼을 작정한 친구들에게 "아이들이 상처 받을 텐데 괜찮겠어?"라고 물으면 꼭 하는 소리가 있다."불행하게 사는 부모 밑에서 맨날 싸우는 모습만 보고 자라는 것보다, 행복한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게 더 낫지 않아?"
이 대목에서 한 번 더 묻고 싶다.
첫째. 남편과 사는 것이 불행했던 내가, 혼자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둘째. 남편과 맨날 싸우지 않으려는 노력을, 충. 분. 히 했는가?
아이들 때문에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들 덕. 분. 에.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친구와 절교하듯 쉽게 남편과의 관계를 팽개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고 지금 내가 느끼는 성취감과 안정감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불행을 피하려면, 불행에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리지 못 하는 수많은 결핍이 있지만, 일단 신경을 끄고
그. 럼. 에. 도. 불. 구. 하. 고.
남편에게 고마운 점, 현재의 생활에 감사한 점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 남편과 싸우고 분을 참지 못 해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이어폰을 꽂고 집을 나서 길을 걸으며 법륜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한 60대 여성의 고민에 대해 법륜 스님은 명쾌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이 아직 열정이 있어서 바람도 좀 피고 돌아다니는 게 나아요? 아님 그럴 힘도 없이 병원에 누워서 똥 수발해주는 부인 옆에 꼭 붙어 있는 게 나아요?"
너무 극단적인 발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래서 법륜 스님에게는 팬의 수만큼 안티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낮추기로.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도박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거나, 술과 마약에 빠져서 가족 모두를 괴롭히는 것만 아니라면 웬만한 것들은 모른 척하기로.
이 말을 듣고, 한 친구가 발끈한다.

"도인이야?"
맞다.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건 도를 닦는 것과 같다.
도를 닦기 싫으면 다 그만두고 제 갈길을 가면 된다.
나는 그냥
도인이 되기로 했다.
이혼한 후 감수해야 할 고통에 비해,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도를 닦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해 목숨도 바치는 게 부모인데, 까짓 거 좀 참고 살지 뭐. 하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오고, 좋은 점을 (애써) 찾으면서 나 자신을 토닥토닥 위안하는 삶의 기술도 터득하게 된다.
행복에 대한 문턱을 낮추면, 더 쉽게 자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유부녀 언니가 말했다. "그 사람은 최소한 내 눈을 보고 이야기해. 남편은 TV 만 보는데 말이지" 진지한 소녀 같은 그녀의 말에, 심통 맞지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도 집에 가면 TV만 볼걸? 게다가, 형부는 최소한 바람은 안 피우잖아."
사실, 내 남편을 본 많은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가정적이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유머러스한 데다 생김새도 든든하니 얼마나 좋겠냐며 한숨을 쉰다. 맞다. 생각해보면 참 멋진 남자이고, 고마운 구석이 많다.
그러나 우리 부부도 엄청 싸운다.
남들은 알 수 없는 여하 간의 사정으로, 때로는 아주 사소하고 쪼잔한 감정의 충돌로, 그냥 노력해야만 굴러가는 관계가 지긋지긋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냉랭해지고,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싸우지 않는 부부는 없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결함이 없는 사람도 없다.
유재석, 백종원, 안정환 등 국민 남편감으로 불리는 남자들과 사는 여인들에게도 속 사정을 들어보면 남들은 알 수 없는 애환이 있을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그래야만 한다!!!!
이렇게 또 주절주절 하다가, 다 지워버리게 될까 봐.....
곧 결혼 17주년을 맞는 도인의 풍모로 한 마디 하고 마무리를 하겠다.
인생은 큰 강물과도 같아서, 의지를 가지고 노를 저어봤자 결국은 큰 물살의 흐름대로 간다.
강물의 구비구비마다 무엇이 있을지,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궂은 날씨를 만나 배가 엎어질 뻔하기도 하고, 때로는 찬란한 햇살에 강물이 반사되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강물의 저 끝에는 폭포가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다.
운이 좋아 순탄하게 항해를 한 사람도, 길을 잘 못 들거나, 배를 잘 못 선택해서 쉴 새 없이 물을 퍼내느라 고생하며 강의 끝에 이른 사람도, 차라리 배를 버리고 헤엄을 치기로 한 사람도, 배에서 뛰어내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걷기 시작한 사람도 결국은 폭포를 만나고 낭떠러지를 만나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죽음을 넘어서면, 거대한 미지의 바다에서 또 다른 항해를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살든 이르는 길이 같다면,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지나온 과거에 집착하여 마음을 부산스럽게 하기보다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신경을 끄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뿐이다.
주문을 외우자.
"나는 남편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쓰레기 봉지를 버려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 내 대신 아이들에게 이빨 닦으라고 잔소리해 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번쩍 들어 차에 실어주는 것 만해도 어딘가? 내 아이를 나 만큼 사랑해 줄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인 것이 어디인가?"
결혼 17년 차, 도인
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