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맞고, 당신은 틀리다.

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by 레이지마마

다 남편 탓이라고 생각했다. 먹던 컵을 여기저기 늘어놓지 않는다면. 자꾸 수건과 까만 옷을 섞어 빨지 않는다면, 고지혈증 약과 짜장 탕수육을 함께 먹지 않는다면, 아이들 앞에서 핸드폰을 하염없이 보지 않는다면, 외출 후 신발을 신발장에 넣는다면, 한번 쓰고 굴러다닐게 뻔한 다이소 운동용품을 사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말을 할 때 제대로 듣고 기억해준다면 우리 부부는 특별히 싸울 일이 없을 텐데. 내 성격이 온화한 덕분에 그나마도 여태껏 헤어지지 않고 살아온 거라고 믿었다.

맘에 안 드는 걸 보고 그냥 넘어가기는 참 힘들다. 남편은 기분이 좋으면 ‘알았어. 알았어.’하며 잘 받아주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잔소리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꾹꾹 참다가 아주 가끔 한 번씩만 부득이한 경우 조심스럽게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꾹 참느라 쉬는 한숨 소리도 싫어했다. 말보다 인상 쓰면서 한숨 쉬는 게 더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그럼 기분 나쁜데 웃냐? 원인 제공을 하지 말던가. 내가 말로 바가지를 긁은 것도 아니고 답답해서 한숨 좀 쉬었기로서니 그것도 못하면 화병 걸려 죽으란 말이야?’라고 퍼붓고 싶지만, 이 번에도 꾹 참는다. 나는 온화한 성격이니까.


잔소리에 등급을 먹이자면 나는 몇 등급일까? 하루 종일 잔소리를 퍼부었던 것으로 유명한 (그래서 세기의 악처라는 불명예를 얻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몇 등급일까? 현명한 아내의 표본 - 배우 신애라 씨의 잔소리 등급은, 나보다 높을까? 낮을까? 분명한 것은 내가 평가하는 나와 남편이 평가하는 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정도는 ‘부부간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에게는 ‘지겨운 잔소리’로 들릴 수 있고, 내 입장에선 ‘상냥한 부탁’이었다고 해도, 남편에게는 ‘그게 더 무서운 잔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눈치 보며 사는 남편이라며 억울해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더 많이 참고, 눈치도 내가 더 많이 보는데. 내가 더 억울해!


그러던 어느 날, 부부 싸움을 한 판 하고 분을 삭이며 앉아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지 말자. 눈치 보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남편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두자. 그러다 정 참기 힘들면 안 살면 되지 뭐.


남편은 여전히 먹던 컵을 여기저기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뒤 따라다니며 컵을 모으지도,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두니, 남편은 (내가 원하는 시간과 격차는 있었지만) 어쨌든 본인 손으로 컵을 정리했다.


남편이 수건과 까만 옷을 함께 넣어 세탁기를 돌리기 전에, 내가 먼저 수건을 따로 빼서 돌렸다. 남편은 다 된 빨래를 널고 걷는 더 귀찮은 일을 담당하게 됐다.


고지혈증이면서 튀김 종류를 좋아하는 남편을 걱정하는 대신, 그냥 함께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다. 운명은 제천이라 하지 않았나. 삼시세끼 현미밥을 먹으며 건강 관리를 하던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사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데… 본인이 건강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보험이나 잔뜩 들어놓는 수밖에! -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그는 일주일에 몇 번씩 땀 흘리는 운동을 하고, 덕분에 나이에 비해 뱃살도 없고 근육도 탄탄한 편이지 않나.


남편은 핸드폰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게임이나 도박에 빠지지는 않았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사실 그가 뉴스를 꼼꼼히 읽고 유튜브로 각종 정보를 얻어 이야기해 주는 덕분에, 내가 따로 뉴스를 안 봐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내가 사는 방식과 다르다. ‘나는 맞고, 당신이 틀리다.’라고 생각했던 확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걸 느낀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 수록,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인생은 결코 계획과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알게 된다.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자 마음먹고,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거두니 - 다시 말해, 상황과 사람을 내 멋대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그의 방식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남편에게도 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는 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 마음에 비친 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