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내 취향은 사실
장동건보다 하정우
원빈보다 류승범인데 말이지
결국 내가 아는 남자들 중 쌍꺼풀이 가장 진한 사람이랑 결혼해버렸지 뭐야.
사람일은 참 모르는 거야.
두부는 물컹하다고 안 먹던 사람이 살다 보니 순두부집 사장이 되기도 하고, 키 180cm 이상 아니면 남자로 안 보인다던 친구가 김병만 같은 땅땅한 체구의 신랑 키에 맞추느라 맨발로 신부 입장을 하게 되는 게 바로 인생의 아이러니이자 흥미진진한 점이지.
평소에 부르짖던 취향과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줏대가 없다거나, 인생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나의 취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의 매력이 분명히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일 거야.
나도 그랬지.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어.
마음이 괴로울 때 전화를 하면 언제든 어디서든 달려와 줬거든. 한참 사라졌다가 몇 년 만에 연락을 해도 늘 환하게 웃는 목소리로 반갑게 대해주고, 남자 친구와 싸우고 눈물을 흘릴 때도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줬지.
비록 쌍꺼풀이 있긴 하지만, 이 남자라면 질풍노도와 같은 나의 삶을, 나무처럼 듬직하게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
기쁜 마음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지. 그리고, 모든 기혼자들이 그렇듯 사랑하고 다투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곧 진실에 눈을 뜨게 됐어.
이 남자는 내가 부를 때만 달려오는 게 아니더라고. 누군가 부르면 언제든 어디로든 열일 제쳐두고 달려갔지. 왜 주변에 그런 사람 하나씩 있지 않아? 사람은 참 좋은데 쉽고 만만한 친구. 이 남자가 딱 그렇더라고.
남자들은 결혼하면 변한다고 하지만, 이 남자는 한결같았어. 나에게만 친절하고 남들에겐 매정했을 거라 믿었던 건 당시 내가 드라마와 현실을 착각하는 순진한 나이였기 때문일 거야. 사람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하기보다 감정에 휘둘려 내 좋을 데로 해석하는 것. 한 마디로 콩깍지가 씌웠던 거지.
콩깍지가 씌워서 한 결정이지만, "아! 잠깐. 내가 판단 미스를 했어!" 하고 되돌릴 수는 없는 게 결혼이야. 어쩌겠어. 그냥 사는 거지. 세상이 끝날 것 같이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그냥저냥 살다 보니 애가 생기고, 아이 덕분에 이혼 위기를 몇 차례 넘겼어. 세월이 흐르면서 요령이 생기더라고. 내가 편하려면 늘 동전의 양면을 보듯 남편을 대해야 한다는 사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야. 남편은 내 생일을 늘 깜빡해. 당연히 결혼기념일도 제대로 기억한 적이 없어. 결혼 후 5년이 지나도록 무심해서 그런다며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살다 보니 그냥 건망증이 심한 거더라고. 그 덕분에 남편은 잘 속아 넘어가. 자기 기억력을 믿지 못하니 내가 그렇다고 우기면 그냥 그렇게 믿고 말지. 전에 빌려간 1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하면,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내놓을 사람이야.
남편은 돈 관리를 할 줄 몰라. 자기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예금과 적금의 차이도 모르지. 덕분에 나는 모든 돈을 내 마음대로 쓰거나 감춰둘 수 있어.
남편은 효자가 아니야. 장남인데 외국에 살고 명절 때 꼭 찾아뵈어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하지. 덕분에 나는 가끔 한 번씩 전화만 드려도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
남편은 참 속이 편해. 나는 회사 일로 전전긍긍하는데, 혼자 유튜브를 보면서 낄낄대지. 울화가 치밀다가도, 결국은 그냥 함께 웃게 돼. 웃다 보면 '그래 인생 뭐 있어?' 하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지지.
남편은 TV를 볼 때 귀가 잘 안 들려. 분명 대답은 하는데 나중에 물어보면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모르더라고.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화도 많이 냈었는데, 대신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니 집중력이 뛰어나. 몇 가지 일을 한 번에 시키면 다 못하지만,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내거든.
남편은 책을 잘 안 읽어. 인터넷도 글보다는 영상을 선호하는 편이야. 덕분에 나는 이렇게 인터넷에 남편 얘기를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지.
비난에 취약하지만, 작은 칭찬이 큰 효과를 발휘해. 욱 하는 만큼, 감동도 잘하지. 잘 생긴 덕분에, 밖에 나가면 불안하지만 팔짱을 끼고 다니면 은근 뿌듯하지. 술을 못 마셔서 함께 취하는 재미가 없지만, 밖에서 내가 한잔했을 때 대리운전이 필요 없으니 아주 든든해.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장점과 단점을 세트로 생각하며 17년쯤 살다 보니 쌍꺼풀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게 아니더라.
어차피 네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익숙해져서, 안 보이면 허전하고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외모보다 건강이 더 중요한 나이가 되었어. 눈이 침침하지 않고, 이빨이 아직 성하고, 몸이 건강하니 그 걸로 됐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그래도 다음 생엔, 하정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