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열한 살이 된 둘째가 아직 뱃속에 들어있을 때, 우리 부부는 뉴질랜드에서 거의 빈털터리로 돌아와 친정집에 얹혀살았다. 남편은 뉴질랜드에서 목조주택을 짓는 빌더로 일했다. 뉴질랜드에서는 빌더가 선망받는 전문 직업군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목수일을 하려면 수요가 있는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려고 다시 돌아온 게 아닌데. 남편도 없이 다섯 살이 된 첫째와 갓난쟁이 둘째를 데리고 친정집 1층, 상가를 개조한 단칸방에 살려니 한숨이 나왔다. 매일 주차 전쟁을 하는 좁은 주택가 골목, 그 길에서 문을 열면 바로 침대가 보이는 집에서 아이 젖을 먹이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궁리를 시작했다.
* 목표 :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 있고 넓은 거실이 있는 집에서 산다.
* 현실 : 집을 구해 나갈 돈이 없다. 남편이 돈을 버니 아껴 쓰면 생활은 가능하다.
* 방법 :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임대한다. 예산은 보증금 1,000만 원 + 월세 70~100만 원선. 월세는 주택의 남는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해서 충당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이제 두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첫째, 최소 방 3개짜리 단독주택을 예산에 맞게 구하는 문제. (지역 선정 포함)
둘째, 보증금 1,000만 원 + 게스트하우스 가구와 집기를 장만하는 데 드는 비용 마련.
아이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존심을 싹 접고 엄마에게 1,500만 원을 빌렸다. 돈이 별로 없으니 서울 근교는 꿈도 못 꾸고 강원도 원주, 전라도 순천, 제주도 등의 후보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불현듯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어떨까?' 궁금해 온라인 벼룩시장에서 임대 매물을 살펴봤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60만 원짜리 전원주택들이 꽤 많이 나와 있었다. 게다가 공항 인근인데 의외로 게스트하우스가 하나도 없었다.
영종도 내에 있었지만 공항과는 대중교통도 없이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 거의 원주민들이 모여사는 시골 동네 가파른 언덕 꼭대기 위의 집. 주인이 살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개발이 되면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지어서, 좋은 단열재나 인테리어의 고급스러움은 기대할 수 없는 집.
하지만, 흙탕물이 섞여 나오는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달리 지하수의 수질이 좋았고, 급경사 언덕이라 겨울에 눈 치울 일이 까마득하긴 했지만 인천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기막힌 야경이 있었다. 게다가, 큰 방 네 개와 거실이 있는 40평도 넘어 보이는 집이 보증금 1,000만 원 - 월세 60만 원.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리할 필요가 없는 새 집이고, 하다 잘 되면,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옆 집도 추가로 임대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폐허처럼 되어 있던 집 앞 흙밭을 호미로 갈아, 꽃도 심고 빨랫대도 만들어 설치하니 제법 사람 사는 집의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20만 원짜리 소파 세트, 15만 원짜리 냉장고, 5만 원짜리 뒤주, 시댁 아파트 재활용 센터에 버려져 있던 병풍, 문 닫은 학원에서 공짜로 얻어 온 의자들...
뉴질랜드에서 어린이집을 다닌 큰 아이가 국제적인 감각을 잃지 않도록, 홍보는 최대한 외국인들에게만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테마를 '한국적인 것'으로 정하고 그에 맞춰서 가구와 소품들을 얻어오고 주어왔다.
방 하나는 우리 가족이 쓰고 나머지 세 개의 방은 도미토리 6인실, 4인실, 2인실로 만들었다. 주로 호텔을 이용할 여력이 안 되는 젊은이들이 묵을 것을 감안해 도미토리 침대 하나에 19,000원으로 가격을 책정했다.
모든 게스트하우스에는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위치가 좋은 것이 최대 경쟁력인 곳도 있고, 특이한 테마를 가졌거나, 파티를 통해 사교의 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잠자리가 편한 것이 숙박업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하고, 음식점은 음식이 맛있어야 하고, 숙박시설은 뭐니 뭐니 해도 침구가 깨끗하고 쾌적해야 한다. 침구는 머리카락 한 올도 금세 드러나는 하얀색 이어야 한다.
덕분에 나의 하루는 빨래와 청소, 다림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온라인 예약 사이트 한 군데에 숙소 이미지와 가격, 설명을 걸어 놓고, 홍보고 뭐고 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게스트하우스를 깨끗이 치우고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집중했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다림질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손님들조차도 '꼭 그럴 필요가 있냐?'라고 만류했을 정도이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다. 내 인건비를 따지자면, 하나도 남지 않는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한 가지만 생각했다. "숙박업소이니 잠자리가 깨끗하고 편안해야지. 정성껏 다림질한 시트와 베갯잇을 주면 나라도 기분이 너무 좋을 거야."
사람들은 어떻게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며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냐고 했지만, 나는 힘든 기억보다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다. 내가 빨래와 청소, 다림질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거실을 오가며 손님들과 어울렸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손님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아이와 공놀이를 했고, 마당에서 유모차를 끌며 보모 역할을 자처했다.
물 흐르듯 일이 착착 진행되고, 힘든 줄 모르고 즐겁게 하게 되는 일이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런 일은 성공한다. 열심히 빨래를 했을 뿐인데, 손님들이 남겨 준 후기 덕분에 게스트하우스는 오픈 한 지 약 3개월 만에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매일매일 가득 찼다. 4개월만에 옆 집을 얻어 방 여덟개, 총 3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했다.
단칸방을 벗어나 마당있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시작한 게스트하우스. 그로부터 10년 후 우리 가족이 단독주택 40채를 짓게 될 지 누가 알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