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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31. 2020

호주 이민 3개월 차,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딱 3년 전 이맘때네요. 우리 가족이 제주에서 호주로 이사를 왔을 때 큰 아들 서진이의 나이는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나이였습니다. 한창 사춘기가 시작되던 무렵, 영어라고는 알파벳과 How are you? Thank you 정도만 알고 호주 시골학교에 던져졌더랬죠. 유학생들을 위해 운영한다던 ESL 클래스도 막상 와보니 없어서, 서진이는 하루 종일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오곤 했습니다. 그 시절 아이에게 썼던 편지를 꺼내봅니다.




서진아 안녕.


살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을 꼽으라면, 늘 엄마는 서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던 때가 떠올라. 서진이가 막 돌 지났을 무렵, 우리 세 식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었거든. 말이 이민이지 그냥 어린 너를 끌고 돈도 한 푼 없이 무작정 간 거야. 당장 매주 내야 하는 렌트비가 걱정이던 때라,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는 16개월 서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엄마 아빠는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을 해야 했어.

일이 끝나고 헐레벌떡 어린이집에 가 보면 다른 애들은 거의 다 가고 늘 서진이 혼자 있었지. 하루 종일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 콧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엄마에게 달려와 안길 때마다 너무 속상해서 엄마도 엉엉 울고만 싶었어.

어린이집 교사라고는 보기 힘든 인도 아줌마가 서진이에게 눈을 흘기며, "하루 종일 울어대서 너무 힘들었다."라고 말하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서진이는 기억 못 하겠지만, 그때 많이 힘들었을 거야. 10년이 지난 일인데도 엄마는 그때 생각만 하면 아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아직도 눈물이 나.


어쩌다 보니 서진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것과 비슷한 시련을 또 한 번 겪게 됐네.


많이 힘들지?
우리 아들이 착해서, 엄마 걱정할까 봐 말은 안 하지만....

늘 떠돌아다니는 엄마, 아빠 따라다니느라, '절친'도 못 만들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하루 종일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


지난 금요일에, 서진이 축구클럽 시즌 마감 행사에 갔잖아. 서로 친한 학부모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행사 진행도 돕고 그러는데.... 엄마는 어디에 껴야 할지, 서먹서먹해서 한쪽에 앉아 맥주만 마셨어.

서로 인사를 하고 웃으면서 대하긴 하지만, 언어도 살아온 방식도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있자니 왠지 외롭고 소외된 기분이 들었달까? 그렇게 혼자 앉아 있으면서, 우리 아들은 얼마나 더 외로울까? 생각을 해 봤어. 엄마는 말이 통하는 데도 선뜻 그들 사이에 끼지 못 하고, 불편한 마음에 집에 가고만 싶은데, 서진이는 하루 종일 멀뚱멀뚱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외롭고 피곤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호주 오기 전에 붙들어 앉혀놓고 빡세게 영어공부를 좀 시켰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후회하지 않지 않을 거야. 수영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네가 필요할 때 스스로 터득한 것처럼, 자전거를 혼자 연습해서 탈 줄 아는 것처럼.... 영어로 하는 의사소통도, 낯선 문화에도 언젠가는 편안하고 익숙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서진이는 스스로 잘 극복할 거라고 엄마는 백퍼 믿어.


그래도 네가 축구를 해서 천만다행이야. 남자들은 축구만 잘하면 학교에서 왕따는 절대 안 당한다며? 학교나 축구 클럽에서 발음도 어려운 서진이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불러주는 친구들이 많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니?


엄마는 네가 참 자랑스럽고 대견해. 축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큰 불평 없이 잘 적응해줘서. 작은 것에도 늘 고맙다고 말해줘서.

살다 보면 극복해야 할 힘든 순간을 자주 만나게 돼.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아기 때나 커서나 똑같이 아프지만 그냥 조용히 한쪽에서 지켜 볼게.

하지만, 힘든 날엔 엄마한테 와서 한 번씩 울기도 하고 그래. 서진아.  


2017년 9월 14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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