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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30. 2020

스물두 번째 이사를 앞두고


- 이 서방은 언제쯤 호주에 들어갈 수 있다니?

- 아무도 모르지 뭐. 호주가 아직 국경을 열 생각이 없어.

- 거기도 코로나가 심한가?

- 퀸즐랜드 주는 요즘 거의 잠잠해. 근데 대도시는 아직 확진자가 좀 있나 봐.

- 이서방이 얼마나 힘들까? 애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 거야.

- 그래서, 4학기 끝나면 우리가 들어가려고. 집도 내놨어.

- 한국에 아예 들어오게?

- 아니, 한국엔 몇 달만 있다가 영국으로 갈까 싶어.

- 응.... 그래....


3년을 기다려 올해 초에야 겨우 비자를 받고 이제 호주에서 정착하나 싶었던 딸네 가족이 난데없이 영국을 갈까 한다는데, 고작 응... 그래...가 뭔가? 마치 "나 오후에 마트에 잠깐 다녀올게"라는 말에 건성으로 하는 대답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 최소한 "뭐? 영국은 또 왜?"하고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기대했던 나는 엄마의 시들한 대꾸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이젠 놀랍지도 않아?"라고 물으며 깔깔대고 웃자, 엄마는 그제야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다는 듯 숨 넘어가게 따라 웃으셨다. 스피커 폰이었는지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빠가 (소파에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게 분명한 목소리로) "야, 야, 다 집어치우고 그냥 여기 와서 살아!"라고 소리를 치신다. "그렇게 돌아다니더니, 이제 국제적으로 이사를 다니냐?"




방금 전 컴퓨터로 엑셀을 켜고 결혼 후 살았던 집들과 아이들이 다녔던 어린이집, 학교를 정리해보았다. 2002년 결혼 후 18년간 스물 한 번의 이사를 했다. 그중 네 번은 뉴질랜드에서, 세 번은 호주에서 집을 옮겨 다녔다. 현재 만 15세, 호주에서 9학년(한국 기준으로는 중3)에 재학 중인 서진이는 다섯 군데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 여섯 곳, 중학교를 두 곳째 다니고 있다. 만 10세, 초등학교 4학년인 서율이 역시 어린이집 다섯 군데와 초등학교 네 군데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하지 뭐' 생각했는데, 막상 적어놓고 보니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왜 우리는 이렇게 부초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나? 왜 우리 아이들은 외교관 자녀도 아닌데 이렇게 전학을 밥먹듯이 하며 살게 되었을까?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고, 철새처럼 옮겨 다니며 꿈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든 좁혀보려 애쓰게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줄곧 단독주택에 살았다. 마당에 노송이 있는 성북동 회장님 댁 같은 단독주택을 상상하지는 마시라.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작은 시멘트 마당과 골목이 있어서 하루 종일 분필로 낙서를 할 수 있었고, 집집마다 연탄을 떼서 겨울이면 아이들이 연탄재를 굴려 어마하게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동네에 있었다. 옆 집 공사로 지반이 흔들려 벽에 금이 갔는데, 엄마가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물에 짓이겨 흙손으로 직접 바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동네 어귀에 리어카 몇 대가 서 있고, 아이들은 리어카 바퀴를 하염없이 굴리며 놀았다. 나는 나름 깔끔한 아이였기 때문에 리어카 바퀴는 안 만지고, 스티로폼을 벽에 긁어 날리며 눈 오는 풍경을 연출하곤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전라도 여수가 고향인 엄마는 할아버지가 옆 집에 버젓이 첩을 들이신 후 할머니가 화병으로 돌아가시자 중학생 나이에 집을 나와 홀홀 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새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 줄기차게 일을 하셨고, 각종 보따리 장사를 하던 중 미제 장사가 대박이 나서 결혼할 무렵에는 꽤 많은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상경한 여학생들은 대부분 재봉공장의 미싱사로 사회 첫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엄마는 어린 나이에도 취직보다 자영업의 길을 택하셨다. 취직하기 싫어서 다양한 장사와 사업을 전전하는 내 인생의 시작점에는 확실히 엄마의 유전자가 끼친 영향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수완이 좋았던 엄마는 한 때 (고만고만한 사이즈이긴 했지만) 단독주택을 열 한채나 소유한 적도 있다. 그때는 양도세가 없고 합법적으로 전매가 가능했기에 금융을 잘 이용하면 내 돈 없이도 집을 사고팔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투자했던 주택의 대부분은 현재 핫플레이스가 된 연남동과 망원동에 있었는데, 1984년, 역사적인 홍수로 망원동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엄마는 졸지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보험 영업에 나선 엄마는 매일 밤 아홉 시나 되어서 집에 들어왔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학교를 마친 후 집에서 동생을 돌보며, 빚쟁이들의 전화 응대를 담당했다. "엄마 집에 안 계시는데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 걸걸한 목소리의 아줌마나 아저씨가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바꿔라"하고 으르렁대셨다. “진짜 안 계세요"라고 몇 번을 반복해서 대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왔다. 나도 자나 깨나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자꾸 거짓말한다고 하니 억울해서 눈물이 났고, 이러다가 혹시 빚쟁이가 집으로 쳐들어올까 봐 걱정이 돼서 엉엉 울었다.


엄마는 그 시절 쥐약을 사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먹고 죽으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자식들이 눈에 밟혀 포기하기를 여러 번. 그 사실을 안 아빠가 "괜찮아. 지난 일이니까 다 잊어. 차근차근 살면서 갚으면 돼."라고 어깨를 두드려 준 덕에 엄마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시도 쉬는 법이 없이 늘 일을 하고, 수박 껍질까지 싹싹 저며 나물 반찬을 만들며 평생을 알뜰하게 사신 엄마가, 평생 고스톱 문제로 속을 썩이는 아빠와 여태껏 이혼하지 않고 사는 이유는 그날 해 준 한마디 덕분이라고 엄마는 종종 말씀하신다.


그렇게 고생을 해 놓고도 재산을 늘리는데 부동산 만한 것이 없다는 엄마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엔 그런 말을 하는 엄마가 복부인 같고 참 싫었다. 그런데 살면 살 수록 내가 참 엄마를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돈이 있던 없던 집 보러 다니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이사를 해야 할 이유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짐을 싼다.


결혼을 한 후 단독주택 인생은 다가구, 다세대 주택 인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서울 땅이 비싸졌다는 얘기다. 부모 덕도 없고 안정적인 직장도 없는 30대 자영업자 부부에겐 작은 18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원했다면 못 이룰 게 뭔가. 나는 아파트가 싫었다. 한 평이든 두 평이든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아이가 생긴 후부터 이 꿈은 더 확실해져서 서울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뉴질랜드로, 영종도로, 제주도로, 호주로 시골 생활을 전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일과 라이프스타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사를 다녔고, 아이들이 크니 아이들 진로 문제를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이사를 한다. 내년에 영국으로 가기로 한 것도 축구를 하는 큰 아들의 소망이 50% 이상 반영된 것이다. 언젠가 유럽에 가서 살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남편과 이산가족으로 지내는 기간이 장기화되어 갑작스레 결정을 앞당기게 됐다.


- 애들아 영국으로 이사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

- (큰 아들) 나는 좋지. 언제 가는데? 나 나이 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작은 아들) 와! 좋아요! 런던아이 타야지! 비틀스 횡단보도도 건너봐야지.


이제 우리 가족은 스물두 번째 이사를 준비하려고 한다. 아이들은 각각 아홉 번째, 다섯 번째 학교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남편의 나이는 쉬흔, 나는 마흔여섯 살이 된다.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엔 여러모로 쉽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보다 설레는 마음이 앞서는 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역마살?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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